명의 진린은 왜 이순신에게 군사지휘권을 넘겼을까
명의 진린은 왜 이순신에게 군사지휘권을 넘겼을까
  • 최성재 교육평론가
  • 승인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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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의 왕 호랑이 같았던 명나라의 진린(陳璘)을 주인의 입술만 쳐다보는 사냥개로 만든 이순신의 비결∥

[명나라 군대의 횡포에 속수무책이었던 조선]

드라마 '징비록'에 등장하는 명나라 군대. 조승훈 명나라 요동 부총병. [영상 캡쳐]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누가 되느냐, 하는 문제는 전시(戰時)에 주권을 다른 국가에 일시적으로 양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공동의 적을 상대로 치르는 전쟁 못지않게 중요하다. 대개 연합군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장수가 그 역을 맡는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장수는 당연지사 조명(朝明) 연합군의 군사지휘권을 독점했다. 이에 대해 조선은 언감생심 뒷공론도 한 적이 없다.

조선은 아예 명군(明軍)을 하늘이 보낸 천사인 양 천병(天兵)이라 불렀다.

쓸개 빠진 임금 선조는 명의 일개 장수에게도 만나기만 하면 그냥 읍도 아니고 큰절을 올리려고 애걸복걸할 정도였다.

평양성 탈환에 명의 이여송이 동원한 군대는 4만 명, 여기에 도원수 김명원은 겨우 오합지졸 1만 명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후에 평양을 떠나 남으로 내려갈 때 조선은 명의 4만 대군 뒤에 순변사 이빈에게 겨우 3천의 군사를 딸려 보냈다. 명의 심부름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시작전권 운운한다는 것은 애초에 말도 안 되었다. 동맹군 사이도 전력이 너무 차이나면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징비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기세등등하던 이여송이 벽제전투에서 왜병에게 참패한 후 혼비백산하여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멀찌감치 꽁무니 빼던 때였다.

여러 장수 가운데 장세작이 더욱 도독 이여송에게 퇴병(退兵)하기를 권하였으며, 우리들이 굳이 간청하며 물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발로 순변사 이빈을 차며 꾸짖었다. (『징비록』 2권)

전쟁으로 초토화된 조선은 명군에게 군량미와 말먹이용 풀을 제공하는 것도 피 말리는 일이었다. 명군의 횡포는 점령군의 그것이었다.

하루는 명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군량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핑계 삼아 제독 이여송에게 군사를 돌리자고 청하였다.

이여송은 노하여 나(유성룡)와 호조판서 이성중과 경기좌감사 이정형을 불러 뜰아래 꿇어앉히고는 큰 소리로 꾸짖으며 군법으로 다스리려 하였다.

나는 사과를 하면서도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징비록』 2권)

유성룡은 이 당시 시기적으로 보아 영의정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명군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조선의 최고위직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도 가차 없이 꿇어앉혔던 것이다.

조선실록 선조 31년 1598년 6월 26일자 기록을 보면,

임금 이하 만조백관이 한강에서 약 5천 명의 병사를 거느린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을 위해 일종의 장행회(壯行會)를 베풀어 주고 있다.

약 한 달간 진린은 한강에 배를 세워놓고 점령군의 위세를 떨친 후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바야흐로 이순신 통제사의 군대를 접수하러 가는 길이었다.

기고만장한 진린은, 두 번이나 읍하며 잘 봐 주십사고 부탁하는 선조에게 대뜸 이렇게 말한다.

배신(임금을 제외한 조선의 모든 사람)들 중에 혹 명(命)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일체 군법으로 다스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조선실록』 선조 31년 1598/6/26

요새 식으로 말하면, 무소불위의 평시 작전권과 전시 작전권을 왕에게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대명(大明)의 장수 마음대로 행사할 테니 알고나 있으란 통고이자 협박이었던 것이다.

진린과 선조의 사이가 고양이와 쥐의 그것과 같았던 당시 상황은 다음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진린은 성질이 사나워서 남과 거스르는 일이 많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 임금께서는 그를 내려 보낼 때 청파 들판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다.

나는 진린의 군사가 고을의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새끼줄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고 다녀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통역관을 통하여 풀어 주도록 하라고 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징비록』 2권)

선조도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듣지는 않아서 비변사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여 좋은 안을 내놓으라고 지시한다. 이에 비변사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조선의 장수들은) 각각 부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소속 군병을 단속케 하여 모든 군기(軍機)와 대사(大事)를 대인의 분부대로 따르고 감히 태만히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으로 회첩(回帖)하시고,

또 이러한 뜻으로 별도로 유서(諭書)를 마련하여 수군의 제장들에게 하송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준행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시면 설령 제독이 직접 군병을 통솔하려고 하더라도 제장들은 아마도 이해할 것입니다. (『조선실록』 선조 31년 1598/6/27)

선조는 한 마디 항의도 못하고 명의 수군보다 훨씬 강한 조선의 수군에 대해서 진린이 마음 내키는 대로 생살여탈권을 휘두르도록 추인한 것이다.

[소정방으로부터 군사지휘권을 넘겨받은 김유신]

EBS 다큐프라임에서 재현된 김유신과 당나라가 서로 칼을 겨눈 모습 [사진=영상 캡쳐]
EBS 다큐프라임에서 재현된 김유신과 당나라가 서로 칼을 겨눈 모습 [사진=영상 캡쳐]

여기서 잠시, 신라를 고구려의 일개 지방보다 못한 양 우습게 여기는 무지몽매한 한국의 소위 지식인에게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 지휘권 문제는 어땠는가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신라의 김유신이 거느린 군사는 5만 명, 당의 소정방이 거느린 군사는 13만 명이었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당연히 당나라가 가졌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은 계백의 5천 결사대에 멱살을 잡혀 식겁하고 사비성 앞에서 당나라의 군대와 만난다.

이때 소정방은 바로 김유신과 기세 싸움에 들어갔다. 그의 목적은 신라를 돕는 척하고 백제에 이어 신라마저 삼켜서 고구려를 유린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양군이 만나는 날짜를 어겼다는 이유로 소정방은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러자 66세의 김유신은 머리카락 10만 올을 일제히 꼿꼿이 세우며 그 자리에서 칼을 빼어 들고 소정방에게 겨누었다.

대장군은 황산벌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너 소정방은 싸우지도 않고 여기 온 게 아니냐, 란 속뜻),

날짜가 늦은 것을 죄라고 하는구나.

나는 죄 없이 욕을 당할 수 없노라.

나는 필히 먼저 당나라와 결전을 벌인 후에 백제를 멸하리라.

(大將軍不見黃山之役 將以後期爲罪 吾不能無罪以受辱 必先與唐軍決戰 然後破百濟)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기세등등하던 소정방이 즉시 꼬리를 내렸다. 당연히 그 이후로 신라와 당은 군사 작전권을 공유했다. 실지로는 신라의 김유신이 잡았다.

황산벌 전투 이후에는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기 때문이다. 큰 전투에서 이긴 군대가 강한 군대고 강한 군대가 지휘권을 잡는 게 당연하다.

[살라미스해전에서 스파르타가 군사지휘권을 차지한 내력]

영화 '300'의 한 장면. 스파르타 군인들
영화 '300'의 한 장면. 스파르타 군인들

군사가 적으면서도 총사령관이 된 경우는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시에도 있었다. 저 유명한 살라미스해전(BC480)에서 그리스의 연합함대는 총 380척이었는데,

그중 아테네가 180척을 냈고

그다음으로 코린토스가 40척을 냈다.

반면에 육군은 최강이었지만 해군이 약했던 스파르타는 겨우 16척밖에 못 냈다.

그럼에도 총사령관은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였다.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들이 아테네의 입김이 너무 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테네의 장군이 총사령관이 될 바에야 각자 흩어져서 되돌아가겠다고 협박했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거나 아테네의 지배를 받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보았던 것이다.

아테네는 현명하게도 지휘권을 양보했다. 우선 당장 자신을 포함하여 헬라스(그리스)를 구하는 것이 급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신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뛰어난 전략과 멋진 논리와 빛나는 언변으로 연합함대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했다.

설령 만장일치로 내린 결정에 따라 에우리비아데스가 내린 명령도 교묘하게 수를 써서 어쩔 수 없이 파기하고 1천200척의 페르시아의 함대를 물리치는 테미스토클레스의 필승 전법을 따르게 만들었다.

페르시아에 몰래 간첩을 보내어 정보를 주는 척하고 살라미스 섬 양쪽을 틀어막게 하여 도망갈 곳 없게 된 그리스 연합함대가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유성룡의 이유 있는 걱정]

유성룡. 사진=구글 이미지

과연, 하늘을 어루만지고 땅을 주물럭거리는 신기막측의 재주를 가졌던(經天緯地之材: 진린이 후에 한 말로 중국 역사상 강태공과 제갈량 두 사람에게만 썼던 최대의 찬사)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했을까.

유성룡은 진린의 안하무인을 보고 여간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함께 앉아 있던 재신(宰臣)들에게 말했다.

“애석하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패할 것 같습니다. 진린과 함께 군중에 있으면 행동하는 것이 억눌리고 의견이 서로 맞지 않겠으며,

그는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침탈하고 군사들을 마음대로 학대할 것인데,

이를 거스르면 더욱 성낼 것이고, 그대로 따라주면 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니,

이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징비록』 2권)

[명량해전 후 조정의 도움 없이 홀로 수군 재건에 성공한 이순신]

광화문 이순신 동상

원균의 참담한 패전 후에 단 12척의 빈 전함을 발판으로 삼아 적진에서 군대를 모으고 적진에서 식량을 모아 기적의 기적을 이룬 이순신은 진린이 올 무렵 다시 오로지 혼자 힘으로 한산도보다 훨씬 큰 고금도에 터를 잡고 불가사의하게(이 과정도 어떤 소설보다 극적임) 수군을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판옥선 42척에 군사 8천명으로 늘렸던 것이다. 원균에게 134척 2만6천명의 군사를 인계했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지만(*), 명의 수군과 합치면 아쉬운 대로 싸워 볼 만했다.

(*선조실록을 보면 조선 수군은 불과 2개월 사이에 1만3천2백 명으로 줄어든다.

오늘날도 선조와 조선의 90% 사대부의 농간에 속아 용장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원균은 통제사가 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당시 조선 전체 군사의 3분의 2를 차지하던 수군의 절반을 뇌물 챙기고 마음대로 제대시켜 버린 것이다! 『조선실록』 선조30년 1597/5/13)

[전시나 평시나 심리전의 달인이었던 이순신]

통영 한산대첩 재현. 연합뉴스

이순신은 진린을 두 번에 걸친 필승전략으로 선조의 호랑이에서 이순신의 사냥개로 만들었다. 심리전의 달인 이순신의 솜씨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이순신은 무엇보다 명군 5천 명을 극진하게 접대한다. 고기, 술, 밥, 국, 떡, 피리, 장고 등 조국을 떠나고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음식과 풍류로 진린 이하 명나라 군대의 혼을 빼놓는다.

예의를 차리되 비굴하지 않게 그들을 적당히 띄워 주면서 극진하게 접대하자, 옛날부터 먹는 걸 유난히 밝히고 중화족 외에는 모조리 오랑캐라고 시건방 떨기를 좋아하는 중국인이 아니던가.

명나라 군대는 입이 귀밑을 휙 지나 머리꼭지까지 쭉 찢어졌다. 축제도 이런 축제가 없었다. 전시 상황이란 걸 까맣게 잊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충무공전서 행록』과 『징비록』을 참고하여 재구성한다.)

며칠 지나자, 명군은 점령군의 본색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차마 눈뜨고 지켜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약 한 달 동안 보였던 그 작태가 되살아난 것이다. 선조실록에 이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유 제독 접반사 김수가 중국군의 민폐에 대해 치계하다

아문의 각 장수들이 전라도 지방에 도착하여 많은 군정(軍丁)을 조발하여 도처에서 수색하였는데, 머리카락이 없는 자(*)는 모두 결박하여 끌고 갔습니다.

(*왜군은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없는 조선 사람의 머리를 잘라 왜군을 목 벤 것이라 명나라에 보고하기 위해서였음.)

그리하여 병으로 머리가 빠진 자나 승려들 역시 모두 잡혀가 하루에만 무려 수백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를 기회로 중국 군사들이 마을에 출입하면서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였으며, 심지어는 소녀까지도 강간하였습니다.

일이 발각되자 제독이 그 중에 심한 자를 효수하였습니다. 『조선실록』 선조31년 1598/8/1

이에 조선 수군과, 이순신만 믿고 고금도로 피난 온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가슴이 찢어질 듯했지만 못 본 척 가만 내버려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때가 찼다고 여기는 순간, 진린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조선의 모든 군사와 백성에게 추상 같은 명령을 내렸다.

대대적인 철수 작전에 들어간 것이다. 짐 보따리만이 아니라 솥과 요강까지 뜯고 들고서 피난길에 나선 것이다.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 알았다가 진짜 남부여대하고 소까지 끌고 강아지도 앞세워 일제히 선착장으로 걸어가자, 명군은 기겁했다.

진린이 버선발로 통제사에게 찾아왔다.

“저, 이순신, 아니 통제사, 아니 통제사 어르신,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당가요잉?”

“보시다시피 이사갑니다.”

“왜요?”

“명나라 군대의 횡포에 못 살겠습니다. 조선을 구원하러 왔다는 대국의 군대가 도적보다 더합니다.”

“아, 그것 말입니까? 제가 단단히 혼내겠습니다.”

“혼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조선 사람이든 명나라 사람이든 따를 법도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게 평시작전권을 주십시오.”

“... 좋습니다.”

[법치의 위력]

이렇게 하여 엄한 법도에 따라 조선 사람 명나라 사람 가리지 않고 칼같이 집행하니, 명나라 군사가 진린보다 이순신을 더 무서워하게 되었다.

슬그머니 이순신은 사실상 전시작전권도 챙겼다. 이순신이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을 보고, 이순신 장군 말이라면 어머니 말씀처럼 아버지 말씀처럼 기꺼이 따르는 것을 보고,

조총을 장난감으로 만드는 조선의 화포를 보고, 명의 수군이 도저히 앞장설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군사력도 정보력도 이순신의 수군이 진린의 수군을 압도]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진린은 나중에 슬그머니 전선(戰船)도 100명이 타는 명나라 사선(沙船)이 아니라 190명이 타는 말 그대로 집채만 한 조선의 판옥선(板屋船)을 달라고 하여 거기에 탔다.

이순신은 조선의 해역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아, 그가 암초투성이인 조선의 다도해에서 멸치의 밥이 되기 십상인 것도,

물 한 모금 밥 한 공기도 이순신이 없으면 마실 수 없고 먹을 수 없다는 것도 진린이 이순신에게 꼼짝 못한 이유가 되었다.

명나라 군대가 말만 거창하지 왜군과의 싸움에서

이순신에 의해 해로가 막혀 식량이 끊어져 굶어 죽게 된 평양성의 소서행장 군대에게 이긴 것 외에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는 것도,

이순신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것도

진린이 이순신을 충심으로 따른 이유였다.

적에 대한 정보도 이순신을 통하지 않고는 거의 알 수 없었던 것도 이순신에게 감복한 이유였다. 군대를 보태 주기만 하면 자신의 공이 절로 올라간다는 것을 안 것도

이순신에게 평시작전권과 전시작전권을 모두 넘긴 이유였다.

후에 이순신은 그 마음이 다도해를 넘어 태평양같이 넓어서 조선군의 공적도 슬쩍 진린에게 넘기기도 했다. 이순신은 인간의 마음을 귀신같이 헤아렸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이양 받은 평시작전권]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은 주한미군으로부터 평시 작전권을 이양 받았다. 잘한 일이다.

민족의 자존심을 내세워 또 다른 노 대통령은 2012년에 미군과 국군이 공유하는 전시 작전권을 각각 따로 나눠 갖기로 했다. 한미동맹을 사실상 깨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전시에 명령권이 2개 있게 된다. 국군과 미군이 명령권이 달라서 여차하면 전투를 벌일 수도 있다. 나라 말아 먹을 일이다.

한국은 이순신이나 테미스토클레스나 김유신의 군대처럼

군사력이 강한 것도 아니고 정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군사정보의 95%를 미군에 의존한다. 미군이 없으면 허공이나 아군에게 총질할 수밖에 없다.

[평화의 이름으로 자초하는 한국의 안보위기]

그럴 리 없지만 그들이 설령 장비를 고스란히 한국에 넘겨준다고 한들 그걸 다룰 사람이 없다. 여전히 기세등등한 친북좌파가 내세우는 ‘민족’은 한국의 국민만이 아니라 동족 2천만을 노예로 삼은 한 줌밖에 안 되는 김정은 집단도 포함한다.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6·15공동선언>을 대한민국의 헌법보다 우선하는 듯한 세 좌파정부의 대북 정책을 보면, 오히려 2천만 노예동포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빼고 3백만 공산 왕족과 귀족만 그들이 말하는 민족의 범위에 드는 듯하다.

대신 거기에는 20세기 후반 지구촌 최대의 불가사의인 한국의 산업화와, 두루뭉술한 민주가 아니라 자유민주를 세우고 키우고 지키는 데 핵심 역할을 담당한 우파는 반민족적 적폐 집단에 드는 듯하다.

명나라도 당나라도 연합군이 아니라 점령군 행세를 하면 악마인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민족도 내 형제자매를 못 살게 굴면 총질하고 대포질하고 굶겨 죽이면 그것은 민족이 아니라 원수요 주적이다.

경제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안보위기는 그것과 차원이 다르다. 이보다 더 어려운 시기가 숱하게 많았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의 국가에게 이 정도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경제를 이론으로만, 정치적으로는 공산체제인 중국과 베트남에서도 30여 년 전(1986도이모이-베트남) 내지 40여 년 전(1978개혁개방-중국)에 폐기한 케케묵은 이론으로만 아는 386운동권이 밀어붙이는 경제정책만 세계 표준에 맞추면, 설령 망가지더라도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안보위기는 그렇지 않다. 한번 망가지면 그걸로 끝이다.

군사력이든 정신력이든 정보력이든,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과 땅굴과 사상전과 통일전선에 속수무책인 한국이 2012년 4월 17일에 맞춰졌던 안보위기의 시한폭탄에서는 지난 두 정부의 냉엄한 현실에 기초한 안보정책에 따라, 휴, 벗어나는가 했더니, 다시 한미(韓美)가 공동으로 행사하는 작전권을 각자 갖기로 했는지,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사실상 사라졌다.

휴전선은 한국의 일방적인 조치로 ‘평화전선’으로 바뀌었다. 북한은 다시 미사일인지(미국) 발사체인지(한국) 쏘아대기 시작했다. 머잖아 두 눈 뻔히 뜨고 수백만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고 수천만 명이 굶어 죽지 않을까 걱정된다, 엄청! (2019. 5. 14.)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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