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의 미소
 

미소만 남고 다 부서져버린 부처가
앉아 있더라

손가락 발가락이 문드러지고
코도 입도 눈썹도 희미해져 눈알이 뽑혀나가
눈먼 흙덩이가
아직도 미소 짓고 있더라
미소의 힘으로
사막의 가마솥에 팥죽을 끓이고 있더라

먹고 갈 사람 먹고 가고 놓고 갈 사람 놓고 가고
가져 갈 사람 가져가시라
빈 손바닥 치켜들어 펼쳐 보이시더라

낙타를 타고 온 거상들이
금으로 옷을 입히고 눈에는 보물을 심고 갔다는데
세계의 도둑들이 다 뜯어갔다는데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그 미소만은
아무도 가져가지 못하였더라

이경(1954~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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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은 기원전 2세기 한무제 때 오아시스를 기반으로 건설된 도시다. 한때 유라시아의 교차로라고 불릴 만큼 교역의 중심지였고, 특히 돈황석굴로 유명하다. 관광안내서에는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불교 관련 물품들을 막고굴(돈황석굴)을 파서 보관했다고 되어있다. 그건 현재시점에서 바라본 해설이다. 당시 막고굴은 수행 장소였고, 수도승들은 자나깨나 불상을 곁에 두고 부처처럼 용맹정진했다.

이경 시인이 돈황에서 본 것은 그 유명한 명사산(鳴沙山)이나 월아천(月牙泉)의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다. 그 대신 시인은 ‘손가락 발가락이 문드러지고 코도 입도 눈썹도 희미해져 눈알이 뽑혀나간’ 불상을 본다. 세기의 도굴꾼들이 제집 드나들 듯 다녀가고 세월에 훼손된 돈황은 명사산 모양을 바꾸는 모래바람만큼이나 을씨년스럽고 안타깝다. 그 속에서 시인은 마치 바람에 모래층이 쓸리며 보물 하나가 드러나듯이 부처의 미소를 본다. 기실 그것은 보았다기보다 발견했다는 게 더 적확(的確)하다.

‘세계의 도둑들이 다 뜯어가도’ 끝끝내 훔쳐가지 못한 부처의 미소.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일체고액(一切苦厄)의 가르침도 아니고, 모든 것은 멸하니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마지막 당부도 아닌 미소를 보았다니. 만해 한용운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시인이 이 같은 부처의 철학을 모를 리 없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의 미소를 최후로 보았다는 것은, 그 미소 안에 철학의 필설(筆舌)과,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영원히 후대로 질 거라는 뜻의 함축이다. 사족을 하나 더 달자면 그 미소는 아무나 보는 것도 아니요,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것도 아닌, 마음을 잘 닦은 사람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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