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중략 ...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1932년 중국 남경의 유서 깊은 유원지 현무호(玄武湖), 9월 중순이라곤 하지만 여전히 후덥지근한 날씨를 피해 사람들이 삼삼오오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 가운데 보트 한 척이 피서객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검은 선글라스를 쓴 30대 후반 남자가 둥근 안경의 20대 후반 남자에게 조선의 정세, 철도망,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수, 노동운동 방법 등에 대해 묻고 있다.

김원봉을 만나고 한 달여 뒤, 육사는 의열단이 운영하는 남경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했다. 정치학·경제학·철학·정보학·비밀공작·암살·사격·폭탄제조 등 정보활동에 필요한 소양과 기법을 배웠다. 이듬해 7월, ‘노동자층에 파고들어 공산주의를 선전하여 노동자를 의식화시키라’는 임무를 띠고 서울로 잠입했다. ‘대중(大衆)’ 창간호에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 ‘레닌주의 철학의 임무’를 기고했다. 이론적 무장을 스스로 다지는 동시에 뜻을 같이할 청년 지식층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그러나 육사의 의열단 정보활동은 여기서 그쳤다. 동료의 배신 때문이었다.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 동안 조사를 받고 1934년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육사가 가는 곳이면 그림자처럼 감시가 따라 붙었다. 교제인물, 출입처,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 여행지와 여행 목적 등 육사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와 검열의 대상이었다. 육사는 문화 활동에만 전념하는 듯했다. 독립운동과는 담을 쌓고 아예 연을 끊어버린 듯했다.

해방을 불과 1년여 앞둔 1944년 1월 16일, 북경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육사가 순국했다. 독립운동에 사용할 무기 반입을 위해 1943년 4월 북경으로 건너갔다 체포되어 고문사 했다. 1934년 6월 기소유예로 풀려난 이후 1943년 4월 북경행까지 육사는 정중동 속에서 줄곧 암중모색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1934년 이후 육사의 여러 산문(散文)에 자주 등장하는 ‘요양 여행’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가장 구실이었다. 독립운동자금의 모금과 전달, 정보활동을 위한 연출된 여행이었다. "어느 날 꼭두새벽에 그 곳에서 해장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곱빼기로 연거푸 아홉 사발을 마시고도 끄덕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듯 주량이 컸었다. 그러나 취하지 않는 주호였다. 밤이 새도록 마셔도 싫어하지 않았지만 떠들지도 않았다. 만취하면 조용히 잠자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인 신석초는 1939년 청포도를 발표할 무렵의 육사를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主義)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었음.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기소유예로 풀려난 직후인 1934년 7월, 경북 안동경찰서가 작성한 육사의 형사기록이다.

육사는 ‘요양 여행’을 다녀야 할 정도로 병약하지 않았다. 육사는 자괴감과 모멸감으로 일제의 감시와 검열에 포박될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육사는 시인이기 이전에 무장 독립투사였다. 독립의 열망을 말로만 노래한 것이 아니고 온몸으로 투쟁한 정보요원이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중략) ...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육사가 바라던 손님? 독립투사를 의미하지 않았을까?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