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⑤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80년대 학생운동

81년 들어서며 반정부 투쟁 본격화...3월 19일 서울대서도 첫 시위
5월부터 '국풍81' 반대운동·시위 잇따르면서 '부림사건'으로 비화
문무대·전방 입소 훈련 반대하다 연행된 학생 강제징집·의문사 빈번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이 무너진 상황에서 전국적 반정부 시위가 1981년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되었다. 5월에는 정치권 차원에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국풍81'이 열렸고, 이에 반대하는 대학가 시위가 잇달았다.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이 무너진 상황에서 전국적 반정부 시위가 1981년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되었다. 5월에는 정치권 차원에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국풍81'이 열렸고, 이에 반대하는 대학가 시위가 잇달았다.

전두환 정권의 검거선풍으로 학생운동은 더욱 더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고, 79년 10.26~ 80년 5.18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반성과 논쟁을 벌였다. 이것이 민주주의 혁명과정에서 학생운동의 역할에 대한 무림-학림 논쟁이고, 그 팜플릿이 ‘야학비판’과 ‘학생운동의 전망’이었다.

전자는 대학생은 노동현장이나 사회로의 진출을 준비하는 사람이니만큼, 사회와 노동현장으로 진출을 위해 준비하자는 ‘현장 준비론’의 입장이었다. 반면, 후자는 전자를 ‘투쟁 회피론’으로 비판하면서 한국사회에서 학생운동이야말로 투쟁역량이 가장 높은 집단이니 만큼, 투쟁을 선도해 나가야 한다는 ‘선도적 투쟁론’의 입장이었다.

서울역 회군과 5.18 이전까지 서울대 운동권의 주류는 주로 ‘준비론’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서울역 회군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며, 전두환 신군부의 무력진압을 목격한 학생 운동권에서 무림의 준비론은 호되게 비판받았다. 그 후 서울대 운동권의 주류진영에서도 학림의 선도적 투쟁론으로 넘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서울대 학생운동의 주류인 언더그룹(무림)이었음에도 소준섭씨와 함께 학생운동의 전망을 집필한 ‘유기홍’이었다. 또 서울역 회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시민도 출소 후에는 선도적 투쟁론의 입장을 가졌고, 일부 언더서클도 선도적 투쟁론으로 넘어왔다.

80년대 초반 대학가를 휩쓴 ‘선도적 투쟁론’

이렇듯 서울역 회군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전두환 신군부의 검거 선풍을 겪으며 지하로 숨어든 학생운동은 이론적으로나 투쟁적으로 훨씬 더 과격해지고 격렬해졌다. 이론에서는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 혁명론’ 수준에서 맑스 레닌주의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이론이 강화되었다.

서울대 학생운동의 주류도 농법학회 등 법대에서 ‘사과(사회과학회)’ 등 인문사회대 중심으로 옮겨왔다.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은 반합법적인 언더서클 위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농법학회(농법), 사회과학회(사과)는 물론, 대학문화연구회(대문), 한국사회연구회(한사), 후진국경제연구회(후경), 흥사단 아카데미(아카) 등이 주요 언더서클이었다.

반면 공개서클도 존재했다. 신식민지사회연구회(신사), 피데스(법대), 탈반(탈춤) 등이 그것이다. 어떤 조직은 공개적인 서클과 비공개 언더서클을 함께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서울대 언더서클 중심의 학생운동 조직은 86년 NL(민족해방계열) 지도부에서 ‘서클주의 배격과 서클 해체론’을 펼칠 때까지 지속되었다.

문무대와 전방 입소 훈련에 반대하는 학생시위도 잇달았다. 사진은 문무대 입소 훈련을 받으러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서울대 학생들의 모습.
문무대와 전방 입소 훈련에 반대하는 학생시위도 잇달았다. 사진은 문무대 입소 훈련을 받으러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서울대 학생들의 모습.

언더 서클 중심의 학생운동은 고려대도 마찬가지였다. 고대는 유신체제 때부터 한맥, 한사, 청년, 민리연, 도산아카데미 등의 이념서클이 존재했다. 그런데, 73년 고대노동문제연구소 김낙중을 중심으로 학원간첩단사건(검은 10월단, 야생화지 사건)이 발생한 뒤,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다.

그것이 ‘청연’ 중심으로 학생운동 조직이 재건되어, 이후 고전 연구회와 겨레사랑회(겨사)로 이어지며 고려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오픈 서클 연합체인 ‘문정’과 대립한 뒤 주도권이 ‘문정’쪽으로 넘어가고, 서울대와 마찬가지로 NL(민족해방계열) 지도부의 ‘서클주의 배격과 서클 해체론’으로 해체되는 과정을 겪었다.

급속히 성장한 연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학생운동

반면, 1970년대 학생운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연세대는 80년 이전까지는 공개적인 몇몇 이념서클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전개되었다. 평화문제연구회(평문), 탈반, 현대사회문제연구회(현문), 등이었다. 이들이 80년 서울의 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이념서클 중심에서 단과대학과 학과별 학회로 전환되었다.

학생들이 있는 단과대학과 학회 중심으로 전환된 연세대 학생운동 조직은 급속히 성장했다. 왜냐하면 언더서클 중심의 서울대, 고대와 달리 단과대와 학회는 일반 학생들과의 접촉과 조직화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과대와 학회 중심의 조직으로 전환된 연세대 학생운동이 급속히 성장하게 된 것이다.

연세대와 같이 80년대 들어와서 학생운동이 급속히 성장한 곳은 성균관대와 이화여대였다. 성균관대에서는 서클에서 저학년에 대한 탄탄한 커리큘럼과 유인물 살포 훈련 등 다양한 훈련과정을 통해 전투적 학생운동 조직이 만들어졌다.

성균관대와 함께 이화여대도 학생운동이 급속히 성장한 대학 중의 하나였다. 이화여대는 여성인 관계로 경찰과 사법당국의 검거와 탄압이 느슨했다. 또한 페미니즘 운동과 함께 발전하게 되어 학생운동 조직력이 급속히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언더서클 중심의 서울대, 고대와 달리 80년대 급속히 성장한 연세대와 성균관대, 그리고 이화여대의 학생운동이 자민투와 대별되는 민민투의 본거지가 된 과정이 설명된다. 즉, 준비론적 경향의 70년대 학생운동의 영향을 덜 받고, 80년대 이후 선도투쟁론의 영향을 받았던 연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가 노선투쟁에서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80년대 들어와 학생운동은 중앙대와 동국대와 경희대, 건국대, 인하대, 전남대, 부산대, 경북대 등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국민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이 무너진 상황에서 학생운동의 정당성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졸업정원제로 급격히 늘어한 대학생 숫자는 학생운동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성장시켰다.

명분을 쥔 학생운동의 폭발적 성장

80년 전국적 비상계엄 확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제일 먼저 시위에 나선 곳은 고려대였다. 10월 17일 2학기를 개강한 이후 비상계엄령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고대 학생들 2~300명은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시위에 들어갔다. 하지만 시위대는 교내에 상주해있던 경찰에 의해 곧바로 진압되어 성북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1980년 10월 17일 고려대 학생들이 제일 먼저 시위에 나섰다. 사진은 고려대 시위 하루 전날 휴업공고가 붙은 정문의 모습.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1980년 10월 17일 고려대 학생들이 제일 먼저 시위에 나섰다. 사진은 고려대 시위 하루 전날 휴업공고가 붙은 정문의 모습.

삼엄한 비상계엄 하에서 시위를 한 탓에 성북 경찰서로 연행된 고대생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잔인했다. 구타는 예사였고, 거꾸로 매달고 물고문을 가했다. 중앙정보부나 보안사, 치안본부가 아닌 일선 경찰서에서 고문이 자행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김관회와 박민서 등 2명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러한 시위는 81년 들어오면서 본격화 되었다. 81년 3월 19일 무림사건으로 학생조직이 일망타진 되어 시위가 없을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서울대에서도 첫 시위가 일어났다. 유기홍, 문용식, 박태견 등 5명이 서울대 학생회관 3층을 점거하고 시위를 한 것이다.

5월에는 정권적 차원에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국풍 81’이 열렸다. 하지만, 대학가에서는 ‘국풍81’에 대한 반대운동과 시위가 잇달았다. 5월 6일에는 연세대와 동국대에서 시위가 있었고, 5월 12일에는 성균관대에서 학내 시위 후 종로까지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또 5월 27일에는 운동권 학생이 아니면서도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학살’을 목격한 뒤 죄책감에 시달리던 서울대생(경제학과 김태훈)이 도서관에서 투신해 자살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 캠퍼스는 2~3일 동안 계속적인 시위로 몸살을 알았다.

이러한 시위사태를 겪으며 경찰과 사법당국은 무림조직 이외에 다른 조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탐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색출된 것이 학림사건이었다. 당시 경찰은 이념서적을 지속적으로 출판하던 ‘광민사’를 주목했고, 광민사 대표를 맡고 있던 이태복 씨와 주변인물들을 탐문하였다.

그 과정에서 광민사 편집부장을 맡고 있던 이선근과 부산에서 6월 12일 시위로 수배 받던 김진모를 검거하게 되었다. 그 후 학림 중앙위원회 회의 자료가 압수되고, 회의를 하러 나타난 박문식, 민병두, 이덕희 등이 연행되었다. 그리고 사건의 여파는 8월 부산지역의 재야, 학생운동 활동가를 엮어서 잡아들이는 ‘부림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정권의 정통성이 상실되고, 학생운동이 정당성과 명분을 확보됨으로써 정권차원에선 곤혹스런 일들도 많았다. 서울대 여학생들이 [민중과 지식인]이라는 책을 놓고 토론모임을 할 때, 전두환의 딸이 참석해서 토론을 한 것이다. 이 일로 화들짝 놀란 전두환은 딸을 미국으로 유학시켜 버렸다.

또, 서울대에서는 국회의장인 윤길중의 아들이 시위를 주동하여 구속되었고, 연세대에서는 이규호 문교부장관의 아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아버지인 장관이 국무회의 때 대통령 전두환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다. 또 남재희 노동부장관의 두 딸은 서울대와 고대에서 시위를 주동해 구속되기도 했다.

문무대와 전방 입소 훈련도 단골 시위 중의 하나였다.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진행되던 문무대 입소훈련이 전두환 정권에 들어와 전방부대 입소 훈련이 추가 되었다. 문무대 입소 후 고된 훈련을 받던 학생들이 시위를 한다든지, 입소 반대 시위에 나선 학생들이 연행되어 군대에 강제 징집되는 상황이 빈번했다.

심지어 81년 11월 고대생들은 문무대에 입소한 뒤 시위에 나서서 109명의 고대생들이 무더기로 강제징집을 당했다. 이렇게 강제 징집된 대학생 중에서 보안사의 녹화사업으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한양대 한영현, 고려대 김두황, 연세대 정성희, 성균관대 이윤성, 서울대 한희철, 동국대 최온순 등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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