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官안명세’가 겹치는 성창호, 김태우, 신재민
‘史官안명세’가 겹치는 성창호, 김태우, 신재민
  • 장자방(필명)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19.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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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재판을 받던 도중 김경수 경남지사를 법정구속 시킨 성창호 부장판사가 사법행정권 남용의혹으로 검찰에 기소되었다. 성창호 판사에게 적용된 혐의는 2016년 법조 비리 사건인 '정운호 게이트' 사건이 터졌을 당시 검찰 수사 기록과 영장 청구서 내용을 복사해 신광렬 당시 형사수석부장판사에게 보고한 혐의가 직권 남용에 해당된다는 검찰의 판단 때문이었다.

성창호 판사는 즉각 부인했다, 관행상 얼마든지 정상적인 업무 절차로 볼 수 있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한 검찰의 조치는 부당하다는 것이 성창호 판사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의 검찰은 성창호 판사의 반박을 묵살한 채, 기소하여 재판에 넘겼다. 성창경 부장판사 측에서는 재판에 앞서 자신의 심경을 담은 의견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견서에는 검찰이 자신을 기소한 것은 권력의 실세인 김경수 지사에 대해 실형선고를 내리고 법정 구속한 것에 대한 정권 차원의 정치적 보복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거 성창호 판사와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에 따르면 성창호 판사는 죄의 성립여부는 오직 법리에 의해서만 결정할 정도로 처신이 반듯하고 올곧은 성품을 가졌다고 하며 그 어떤 외풍에도 정치적인 판단은 절대 하지 않을 꼿꼿한 법관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평가하고 있다.

◇성창호, 죄의 성립은 오직 법리로 결정

이런 성품과 소신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리 정권의 실세 김경수라고 해도 법리를 따져보니 죄가 분명하다고 판단하여 유죄선고와 동시에 법정 구속을 시켰을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이 성창호 판사를 기소하여 재판에 회부한 것은 정권 차원의 정치보복이라는 성창호 판사 측의 주장이 설득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

특히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는 추론 때문이기도 하다. 성창호 판사처럼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과 줏대를 지키다가 시련을 겪은 역사 속의 인물들은 무수히 많다. 문재인 정권 하에서도 여러 명 등장했다. 성창호 판사가 검찰로부터 기소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한 인물이 떠올랐다.

자신의 소신과 지조를 지키다 젊은 나이에 정치권력의 희생물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선시대 사람 ‘안명세’라는 인물이 주인공이었다. 사람들은 해가 바뀌어 신년이 되면 한해 운수를 점치기 위해 토정비결을 즐겨 본다. 토정비결을 지은 이가 충청도 보령 사람 이지함(李之函)이다. 안명세는 이지함의 절친한 고향친구였다.

안명세는 25살이었던 중종 39년(154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여문관에 들어가 검열과 주서(注書)를 지내고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인 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때는 중종이 서거하고 명종이 즉위한 해이기도 했다,

명종이 즉위하자 이기와 정순붕이 사단을 일으켜 왕실의 외척인 장경왕후 가족의 대윤과 문정왕후 가족인 소윤 간에 권력쟁탈전이 벌어졌다, 이것이 을사사화(乙巳士禍)였고 권력투쟁의 최종 승자는 소윤이었다. 을사사화가 끝나자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소윤은 대윤을 철저하게 보복했다. 윤원로를 비롯한 대윤파 100여명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로 숙청을 당해 대거 희생되었다.

을사사화라는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었던 안명세는 을사사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원인과 배경, 전개과정 등, 자세한 전말을 춘추필법에 따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사실대로 적었다. 사관(史官)이라면 당연히 기재해야할 시정기(時政記)였다.

시정기란 당대 정무 행정의 실상과 잘잘못을 기록한 1차적 역사 기록물로서 실록을 편찬하는 사초의 기본 자료로서 임금이라고 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안명세가 작성한 시정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 등 3대신이 살해당한 것은 크나큰 불행이라는 지적과 함께 이기와 정순붕의 농간으로 무고한 많은 선비들이 처형당한 사실과 이를 찬반(贊反)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권력투쟁이 일어나는 곳엔 언제나 배신자가 있다는 것을 젊은 사관 안명세는 몰랐다, 이때 안명세와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안명세가 쓴 시정기의 내용을 을사사화의 빌미를 제공했던 이기에게 밀고해 안명세는 졸지에 사실을 왜곡시킨 죄인으로 몰려 국문을 당하는 처지로 변했다,

◇안명세, 죽음 앞에서도 의연

안명세는 참혹한 국문을 당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 정순붕의 죄악을 폭로하면서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이때 안명세의 나이는 약관 30세에 불과했고 과거에 급제한지 불과 4년에 불과한 초급관리 신분이었다.

안명세를 참형(斬刑)시킨 소윤일파는 과연 죽을 때까지 권력을 잡고 부귀영화를 누렸을까? 결코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1565년 문정대비가 죽자 을사사화를 일으킨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일파는 몰락했고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안명세는 신원(伸寃)되어 직첩(職牒)을 다시 돌려받아 복권되었고 명예도 회복했다. 안명세는 형장에서도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순간까지 소신을 지켰으며 흐트러지는 모습은 결코 보여주지 않았다.

이지함은 현장에서 이 광경을 끝까지 지켜봤고 형 집행이 끝나자 아무도 없는 틈을 이용하여 안명세의 시신을 수습해 주었다. 이때 충격을 받은 이지함은 권력의 비정함과 염량세태(炎涼世態)를 절감하며 천문지리와 역학에 매진하는 계기로 삼았다. < 소설 토정비결 : 이재운 著>

성창호 부장판사, 김태우 전 수사관, 신재민 전 사무관은 안명세처럼 서슬이 시퍼런 정권에 단기필마로 맞서다 시련을 겪고 있는 당사자들이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빠르게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시간의 흐름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말을 물가에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있겠지만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듯이 시간의 흐름은 언젠가 이들에게도 명예회복의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gw2021@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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