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최근 글로벌 경영환경의 불확실성 확대를 이유로 4조3000억원이 투자되는 충북 청주공장 증설 계획을 전격 보류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은 SK하이닉스 청주공장의 M15 팹,/SK하이닉스

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 배터리공장 건설을 재검토키로 한데 이어 SK하이닉스도 청주공장 증설 계획을 잠정 보류했다. 국내외 경제환경이 ‘3고(고유가·고환율·고물가)’로 대변되는 복합위기에 빠지면서 기업들이 신규투자에 대한 속도조절에 나서는 모양새다.

19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 이사회가 지난달 29일 청주공장 증설 계획을 보류시켰다. SK하이닉스는 이날 이사회에서 청주공장 증설안을 확정하려 했지만 증설 시기나 필요성에 대해 좀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됐고 격론 끝에 결정을 보류한 것으로 전해졌다. SK하이닉스도 이 같은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당초 SK하이닉스는 2025년 완공을 목표로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 내 43만3000㎡ 부지에 4조3000여억원을 투자해 신규 반도체 공장(M17)을 세울 예정이었다. 향후 2~3년간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수요가 지속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에 따른 선제적 조치였다. 하지만 이사회가 계획을 보류하며 내년 초로 잡혀있던 착공은 연기가 불가피해졌다. SK하이닉스 관계자도 "향후 일정은 결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번 결정의 원흉으로 올 2분기 들어 급격히 얼어붙은 반도체 업황을 꼽는다. 실제 SK하이닉스의 주력제품인 메모리반도체는 수요둔화와 단가하락이라는 이중고에 직면해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 등이 정보통신(IT) 제품 수요를 꺾은 상황에서 3고의 망령까지 덮친 결과다. 그렇게 D램 가격은 지난해 9월 고점(4.1달러)을 찍은 후 지난달 3.35달러까지 떨어졌다. 올 3분기엔 2분기보다 10% 더 내려갈 수 있다는 게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의 관측이다. 낸드플래시 가격도 수요부진의 여파로 지난달부터 하락세로 전환됐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는 청주 M17 팹에서 D램이나 낸드를 만들 계획이었지만 업황이 암울해 증설의 당위성이 크게 약화됐다"며 "원화 약세와 원자잿값 급등으로 예정보다 투자비가 증가할 수 있다는 점도 경영상 압박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계는 앞으로 산업계 전반에 SK하이닉스처럼 신규투자를 자제하는 분위기가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퍼팩트스톰의 공포는 특정기업이나 산업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이를 해소할 마땅한 모멘텀도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반도체 업계만 해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최강자인 대만 TSMC가 올 2분기 어닝서프라이즈급 실적을 올렸음에도 최근 시설투자 계획을 기존의 최대 440억 달러에서 400억달러로 하향 조정했다. 또 미국 마이크론이 지난달 신규 공장·설비투자 감축 의사를 천명했고 18일(현지시간)에는 애플이 경기둔화에 대응해 지출을 줄이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다. 이미 지난달 29일 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 애리조나에 1조7000억원을 들여 짓기로 한 원통형 배터리 단독공장의 투자 시점·규모·내역을 전면 재검토 중이라고 공시했다. 글로벌 경영환경 악화로 인한 투자비 급등이 이유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경기침체 위기 속에서 무리한 투자를 강행하면 더 큰 위기를 자초할 수 있는 만큼 돌다리도 두드려보자는 진중론이 경영계에서 힘을 얻고 있다"며 "기존의 덩치키우기 전략을 손보는 기업들이 줄이을 공산이 크다"고 예상했다.

현재 투자계획을 조정할 개연성이 높다고 거론되는 곳은 주로 그룹사들이다. 경제적 빙하기가 본격화되기 이전인 지난 5월 새정부 출범 직후 수십~수백조 규모의 통큰 투자를 선언하면서 부담도 훨씬 큰 까닭이다. 당시 삼성을 필두로 현대차·롯데·한화·SK·LG·포스코·현대중공업 등 12개 그룹사가 발표한 투자액만 무려 1080조6000억원에 달한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여전히 원래의 투자계획을 고수한다는 입장이지만 내부적으로는 계산기를 다시 두드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5년간 450조원의 투자를 계획 중인 삼성전자의 경우 곧 투자 축소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외신들의 추정이 쏟아지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대다수 업종의 업황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어 수익성 우하향에 대한 위기감도 날로 고조되고 있다"며 "어떤 기업이 투자를 축소·보류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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