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이 종교대립으로, 비극의 섬 아일랜드 (1)
종교개혁이 종교대립으로, 비극의 섬 아일랜드 (1)
  • 하야시 신고(林信吾(1958년 출생, 작가・저널리스트)
  • 승인 2019.0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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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信吾의 「서방견문록」

[Japan In-depth 2019/5/28]

【요약】

·영국의 정식 국명은 ‘그레이트 브리튼 및 北部아일랜드 연합왕국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아일랜드의 역사는 종교적 정치적인 항쟁 역사

·종교대립이 아일랜드의 역사를 비극으로 가득 차게 해 나갔다

톱 사진)아일랜드의 성(城)
출처)Pixabay;Andreas Senftleben

일본사람이 일반적으로 ‘이기리스(イギリス)’라고 부를 경우에는 유럽대륙의 서부 외해에 떠 잇는 大브리튼섬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 大브리튼섬의 더 서쪽 바다에 떠 있는 섬나라가 아일랜드다. 이 곳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고 북부는 영국의 일부다.

지금 굳이 ‘이기리스(イギリス)’라고 부르지만 ‘이기리스(イギリス)’의 정식 국명은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부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일본에서 이기리스라는 호칭이 정착된 것은 잉글랜드(England)의 포르투갈(Portugal)어 사투리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나는 이기리스라는 일본어가 그것도 틀린 속칭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하여 역사적 호칭으로서는 ‘잉글랜드’를 현재의 국명을 약칭할 경우는 일본에서도 친숙한 영국(英国)을 채용하고 있다. 이것이 그 나라의 역사를 다소나마 공부하고 있는 자의 태도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연고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본 시리즈에서 차츰차츰 설명할 것이다.

본 시리즈에서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아일랜드다. 녹음에 싸인 한가로운 섬나라였는데 그 역사는 종교적・정치적인 항쟁의 비극으로 채색되어 있다. 최근에는 또 영국의 EU 탈퇴문제, 이른바 브렉시트 (譯註 Brexit는 "British" 와 "exit" 의 혼성어)로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항쟁이 재연될 위험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사진)Brexit Protestors London 2018년12월출처)Flickr; ChiralJon
사진)Brexit Protestors London 2018년12월. 출처)Flickr; ChiralJon

약간 말을(2400년 정도의 웃음) 돌리면 이 섬에 사는 사람은 켈트인이라 불리며 일본에서는 ‘켈트의 섬’이라는 별명까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다신교를 축으로 하는 켈트문화를 수용한 사람들은 유럽 중부 평원(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 등)으로부터 스페인 북부, 동유럽에까지 생활권을 넓혔다.

그러나 그만큼 광범위하게 살았던 사람들 간에 민족적 일체감이 존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현대의 민속학이나 고고학에서는 ‘켈트계’라고 하는 대략적인 정의가 내려져 있다. 일본의 전 축구 국가대표 中村俊輔가 적을 두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의 강호(強豪)클럽은 그 이름을 셀틱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것이 ‘켈트인의’라는 의미다. 켈틱으로 발음하는 사람도 많아 아일랜드의 민속악기인 竪琴(타테고토)는 ‘켈틱 하프’로서 일본에서도 알려져 있다.

사진)켈틱 하프출처)Flickr; Bea
사진)켈틱 하프. 출처)Flickr; Bea

켈트로 들으면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를 생각에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 것은 이와 같이 아직 켈트문화 색깔이 진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민속학에서는 유럽대륙에 광대한 생활권을 지녔던 사람들을 ‘대륙의 켈트’라 부르고 현재의 영국에서 살고 있은 사람들을 ‘섬의 켈트’라고 부른다.

하지만 유전자 해석기술이 장족의 진보를 성취한 결과 대륙의 켈트와 섬의 켈트와의 간에 는 혈연관계가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왔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대륙의 켈트의 일부가 바다를 건넜을 것이라는 종래의 학설이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언어적・문화적 공통성이 있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아마도 오랜 세월에 걸친 교역의 결과라고 최근 연구자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원래 다신교와 숲(森)의 요정(妖精)전설 등은 옛날의 일본열도에도 있었다. 그러한 세계관은 최근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姫)’라는 영화에 묘사되기도 했다.

여하튼 섬의 켈트는 대륙에서 로마가 발흥하여 이윽고 브리튼섬 남부가 속령 브리타니아(Britannia)로 되고나서도 그 지배를 받은 적은 없었다. 이 속령(属領) 브리타니아야말로 브리튼의 어원인데 원래는 섬의 남부에 상륙해 온 로마군단에 최초로 맞섰던 켈트계의 브리튼족에서 나왔다.

즉 브리타니아란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의 브리튼섬 남부를 말하는 것이다. 북부는 칼레도니아라고 불렀다. 수풀의 나라라고 할 정도의 의미인 것 같다. 여하튼 로마 지배 아래로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섬의 켈트가 문화적 독자성을 지킨 이유다.

우리는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4세기까지는 국교의 지위를 확립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약간 늦은 5세기에는 지금도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으로 되어 있는 성聖패트릭에 의하여 그리스도교의 전도가 시작되었는데 이 섬의 사람들은 정말로 온건하게 그 가르침을 수용했다. 순교자가 거의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사진)아일랜드에 그리스도교를 보급한 성인(聖人) 聖패트릭의 기일(忌日)에 행하는 聖태트릭 축일의 모습출처)Pixabay;Lisa Larsen
사진)아일랜드에 그리스도교를 보급한 성인(聖人) 聖패트릭의 기일(忌日)에 행하는 聖태트릭 축일의 모습. 출처)Pixabay;Lisa Larsen

잉글랜드에서 초대 캔터베리 대사교(大司教)가 임명되어 전도가 본격화된 것은 6세기에 들어와서부터 일이다. 때문에 그리스도교문화권으로 편입된 역사도 남보다 앞서게 되었다. 이와 병행하여 브리튼섬 남부에서는 정권교체가 일어났다. 로마의 판도가 게르만민족 위협에 직면했다는 이유로 속령 브리타니아를 포기했던 것이다. 409년의 일이다.

그 후 이 땅을 지배한 것은 색슨(Saxon)인이다. 이들은 어느 사이에 로마인 대신에 브리튼섬 남부에 진출했던 사람들인데 앵글로색슨(Anglo-Saxon)이라 불리게 되었다. 색슨인도 게르만민족의 일파이지만 현재의 독일인과 동일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독일에 색슨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족의 역사에 그 이름이 남아는 있다.

이 무렵의 브리튼섬 북부는 여전히 ‘섬의 켈트’의 판도였다. 그들은 앵글로색슨으로부터 ‘스코츠(Scots)’로 불렸다. 이는 원래 중국인이 일본인을 부를 때 쓴 ‘왜인(倭人)’처럼 멸시를 담아 부르는 방식이었다. 현재도 여기는 ‘스코츠의 땅=스코틀랜드(Scotland)’로 불리고 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우리는 잉글랜드인이 아니다.스코츠다”라고 하며 가슴을 펴고 있다.

이러한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이 계기가 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된 것은 1517년인데 잉글랜드에서는 1534년에 당시 국왕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문제도 얽혀 급기야 로마교황청과 결별하고 잉글랜드국교를 세웠다.

사진)마르틴 루터출처)Cranach Digital Archive
사진)마틴 루터 출처)Cranach Digital Archive

이 움직임은 스코틀랜드에도 파급되어 스코틀랜드성공회(국교회라고도 함)를 포함한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크게 신장했다. 한편 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 신앙을 지키는 사람이 압도적 다수였다. 현재도 인구의 95퍼센트가 가톨릭신자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종교대립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 아일랜드 역사를 비극으로 가득차게 했다.

<2편으로 이어짐, 모두 6회 예정>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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