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해적국가」 비극의 섬 잉글랜드 (2)
종교개혁과 「해적국가」 비극의 섬 잉글랜드 (2)
  • 하야시 신고(林信吾、1958년생)작가・저널리스트
  • 승인 2019.0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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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信吾의 「서방견문록」

Japan In-depth 2019/6/1

【요약】

・16세기의 잉글랜드는 명실 공히 해적국가였다.

・잉글랜드의 가톨릭 대치는 아일랜드의 비극적 운명에 박차

・잉글랜드는 주변국으로부터 신앙과 경제활동 면에서 원한을 샀다.

톱 사진)버버리 코롤세어와의 해전
출처)UK ART

지난 회에서 잉글랜드에서 국교회가 성립되어 로마교황청과 헤어졌기 때문에 아일랜드는 종교대립으로 말려들었다고 말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국교회가 성립된 것은 1534년인데 그 이후 교황청에 대한 충성 즉 가톨릭의 신앙을 계속 지켰던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왕가로부터 눈에 가시처럼 되었다.

물론 잉글랜드는 잉글랜드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당시 유럽대륙에서는 스페인 세력이 대두하여 황금시대라 불렸다. 구체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 5세(1500〜1558)가 유럽대륙의 거의 서쪽 절반과 광대한 식민지를 영유했다. 그의 아들 펠리페 2세(1556〜1598)는 포르투갈왕도 겸하게 되어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했던 것이다.

이 펠리페 2세는 좋든 싫든 가톨릭의 신앙이 돈독하여 “이단자의 위에 군림할 정도라면 생명을 100번 잃는 편이 낫다”는 말까지 남아있다.

사진)펠리페 2세출전)Antonis Mor
사진)펠리페 2세출전)Antonis Mor

원래 신성로마제국 자체, 중앙에서 발흥한 합스부르크가(家)가 교황청의 정치・군사부문을 제멋대로 떠맡아야 했던 존재로서 펠리베 2세는 가톨릭에 의한 유럽 재통일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같은 가톨릭의 신흥을 지키려고 하는 포르투갈인에 대해서는 정말로 관대했던 반면 교황청에 맞선 ‘이단’ 잉글랜드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때려 부수겠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짐해서 말해 두자면 신앙만이 양자의 대립 원인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스페인의 황금시대를 뒷받침한 것은 중남미의 식민지로부터 가져오는 풍부한 은(銀)과 물산이었다. 잉글랜드는 말하자면 왕가까지가 해적에 투자해서(!)그 교역선을 열심히 습격시켰던 것이다. 잉글랜드 왕가는 투자의 반대급부로서 상납금을 받아들였는데 그 액수란 것이 당시의 국가예산에 필적했다고 한다.

작금 국제사회로부터 백안시당해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나라가 ‘해상계류 환적 밀무역’을 계속하고 있어서 문제가 되어 잇지만 16세기의 잉글랜드의 행위는 그 정도의 소동이 아니었다. 잉글랜드는 사실 스페인으로부터는 ‘해적국가’라는 비난을 받았다.

물론 거기에도 잉글랜드에는 잉글랜드의 논리가 있었다. 스페인에 의한 침략 위협에 처해 있는 이상 그 경제력에 타격을 주어 해상수송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국방상 매우 유효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16세기 잉글랜드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카리브의 해적’이란 모험심과 애국심을 겸비한 용사들이었던 것이다.

사진)해적 흑자(黒髭="검은 수염" 즉 "Blackbeard와 싸우는 메나드 대위출처)Wikipedia
사진)해적 흑자(黒髭="검은 수염" 즉 "Blackbeard와 싸우는 메나드 대위출처)Wikipedia

<譯者 蛇足: "Blackbeard"는 에드워드 티치(Edward Teach(1680 - 1718)를 말하는데, , 카리브 제도와 미국 동부 해안에서 활동하던 18세기의 악명높은 영국계 해적임>

20세기 이후의 할리우드영화와 일본 만화에 까지 그러한 세계관을 집어넣은 것은 아무래도 그렇지 설마 생각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화제를 돌려 신앙 면에서도 또한 경제적인 속셈에서도 잉글랜드에 대해서 울화통이 터진 펠리베2세는 1568년 무적함대를 파견했다.

이를 맞받아 쳤던 잉글랜드왕이 바로 엘리자베스1세 여왕이다. 그녀는 뜻밖에도 해적의 우두머리였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잉글랜드함대의 부관(副官;사실상의 사령관)에 임명했다. 그 드레이크는 유격전법으로 무적함대를 피로하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장작 등의 가연물질을 가득 실은 배에 불을 질러 적함대의 가운데를 돌진하는 특공작전으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사진)프랜시스 드레이크출전)Art UK
사진)프랜시스 드레이크출전)Art UK

그렇게 해서 잉글랜드가 드디어 연합왕국=英國이 되어 스페인 대신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자리를 획득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장래의 이야기이고 무적함대를 물리쳤다고 해서 스페인의 위협이 사라졌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아일랜드의 운명을 한층 비극적으로 만들었다. 이것 또한 잉글랜드 입장에서 보면 스페인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세력을 정면으로 보고 대치했는데 가톨릭국가 아일랜드는 ‘배후의 위협’이었다.

또 사실 잉글랜드 함대에 패한 무적함대는 우선 북방으로 도주한 후 브리튼섬 북부를 우회해서 스페인으로 도망하여 돌아갔지만 일부가 도중에 아일랜드에 기항해서 보급을 받았다. 그 사이 잉글랜드 함대는 보급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차 출격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잉글랜드는 아일랜드를 제압해야 했고 파병을 되풀이하여 1600년대부터는 이른바 얼스터(Ulster) 식민(植民)을 개시했다.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북부의 얼스터 지방에 주로 스코틀랜드로부터 다수의 이민을 들여보낸 것이다. 지난 회에서 말한 대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주민은 함께 ‘섬의 켈트’ 즉 민족적으로 한 뿌리로서 문화적인 결속도 강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스코틀랜드로부터 넘어 온 사람들은 옛부터 전해온 게일語 (Gaelic),를 죄다 잊어버리고 영어를 모국어로 하여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갖게 되었다.

더욱이 그들이 말하는 식민(植民)이란 원래 얼스터에서 살고 있었던 카돌릭 주민을 특정 거주구로 몰아넣고 빼앗은 토지에 자기들의 생활권을 구축한 것이었다. 바꿔 말한다면 아일랜드에 원래 살고 있던 가톨릭 주민의 입장은 신대륙의 원주민, 아프리카의 흑인과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300년이 지나 구체적으로는 20세기 말의 통계를 보면 얼스터지방에서 금융자본의 100%, 제조업의 70% 이상, 서비스업의 과반수가 프로테스탄트의 것이었다. 카톨릭은 하층노동자계급과 동의어였다.

결국은 스페인에서도 아일랜드에서도 잉글랜드는 신앙과 경제활동 양면으로부터 적대시당해 원한을 샀던 것이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잉글랜드에서 보면 강대한 가톨릭세력 위협에 대항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가장 입장이 약한 자가 최대의 피해자가 된다는 구도만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 구도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막다른 곳으로 몰린 약자가 무기를 손에 넣었을 때 역사는 또다시 크게 동요하고 새로운 비극이 초래되는 것이다.

톱 사진)버버리 코롤세어와의 해전

출처)UK ART

<3편으로 이어짐, 모두 6회 예정>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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