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1921년 5월 이승만 떠난 상해임시정부
민족주의·공산주의 끝없는 이념갈등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독립운동의 물꼬를 공산주의로 바꿔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 이승만 축출
개조·창조파 대립 속 소련식 국가수립
역풍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혼란
공산주의 몰락을 66년 전에 예측

류석춘
류석춘

‘워싱턴 군축회의’라는 또 한 번의 실패를 맛본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1922년 9월 조용히 하와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6개월 후인 1925년 3월 18일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했다. 그 사이 상해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이승만은 자신을 옥죄어 오는 공격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복잡한 일들을 최대한 압축해 살펴보자.

이승만이 상해를 떠난 1921년 5월 이후에도 임시정부는 공산당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간의 소모적이고 지루한 싸움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 외교독립 노선이 총력을 기울인 ‘워싱턴 군축회의’가 1922년 2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민심이 급격히 돌아섰다. 임시정부를 흔들던 ‘고려공산당 상해파’는 호기를 만났다. 이들은 이승만을 포함한 내각의 총사퇴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들은 대부분 1922년 1월 23일 레닌이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극동민족(무산자)대회’에 참석한 세력이었다. 레닌의 지도 하에 소련공산당은 1919년 3월 ‘국제공산당’ (국제공산주의 약칭 ‘코민테른’ 혹은 ‘제3인터내셔널’) 을 창건하고 전 세계에 공산국가를 확산하는 방법으로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강조했다. 이를 실천하는 수단으로 개최한 것이 ‘극동민족대회’였다. 이 회의 개최가 워싱턴의 실패와 맞물리면서 독립운동의 흐름은 공산주의에 올라타는 방향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이들은 ‘통일전선’ 전략을 구사하라는 레닌의 지도를 받아 안창호 세력을 끌어들여 이승만을 축출하는 수순으로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를 ‘완전히 새로 만들자’는 이른바 ‘창조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 북경 군사통일회의) 대(對) ‘고쳐서 다시 쓰자’는 이른바 ‘개조파’ (고려공산당 상해파 + 여운형 + 안창호) 가 충돌했다. 천하의 레닌마저도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종특인 분열 유전자를 잠재울 순 없었다.

이승만이 지적한 ‘공산당의 부당함’을 정리한 인포그래픽 이미지.
이승만이 지적한 ‘공산당의 부당함’을 정리한 인포그래픽 이미지.

지친 개조파 일부가 만주로 돌아가면서 회의를 비토했다. 창조파는 ‘얼씨구나’ 하며 1923년 6월 2일 소비에트를 모방한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창조파의 독단은 역풍에 휩싸였다.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소련파)를 제외한 모든 세력이 반대했다. 심지어 북경의 군사통일회의 박용만과 김창숙도 반대했다. 상해 임시정부 민족주의파의 반격도 이어졌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김구는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령했다. 한 마디로 ‘개판’이었다.

이 이전투구를 바라보며 하와이의 이승만은 자신이 발행하는 『태평양잡지』 1923년 3월호 (31호) 에 공산주의의 장단점을 논한 글 ‘공산당의 당부당’ (當不當, 옳고 그름) 을 발표했다. 이 글만이 아니었다. 태평양잡지 1924년 7월호에는 동아일보에 기고했다는 ‘사회·공산주의에 대하여’를 재수록했고, 1925년 7월호에서도 다시 한번 ‘공산주의’라는 글을 발표했다 (김현태, 2016, 『이승만 박사의 반공정신과 대한민국 건국』 비봉출판사).

세 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글이 ‘공산당의 당부당’이다. 이 글은 1917년 레닌의 공산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가 공산주의라는 사탕발림에 속고 있을 때, 그리하여 독립운동의 대세마저 공산주의로 돌아서고 있을 때, 공산주의를 객관적으로 그리고 냉정하게 평가한 글이다. 비록 현실 정치에서 잠시 패배했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선각자 이승만의 통찰력이 빛나는 글이다.

공산주의는 이 글에서 이승만이 지적한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며 결국 1989년 종말을 맞았다. 이승만의 ‘Japan Inside Out’이 6개월 후 일본의 미국 공격을 내다본 글이라면, ‘공산당의 당부당’은 소련 공산주의의 몰락을 66년 전에 내다본 글이다. 워낙 중요한 글이라 전문을 통째로 싣는다. 영어로 쓰였다면 레닌의 ‘공산당선언’을 최초로 그리고 완벽하게 무력화하는 국제적 텍스트가 되고도 남았을 글이다.

"공산당 주의가 이 20세기에 나라마다 사회마다 전파되지 않은 곳이 없어, 혹은 공산당이나 사회당이나 무정부당이라는 이름으로 극렬하게 활동하기도 하고, 혹은 자유권이나 평등권의 이름으로 부지 중 전파되기도 하여, 전제 압박하는 나라나 공화·자유하는 백성도 그 풍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가 없도다.

공산당 주의도 여러 내용이 있어서 그 의사가 다소간 서로 같지 아니하나 보통 공산당을 합하여 논의해보면, 그 주의가 오늘 인류사회에 합당한 것도 있고 합당치 않은 것도 있으므로, 이 두 가지를 비교하여 이 글의 제목을 ‘당부당’(當不當, 옳고 그름)이라 하였다. 우선 그 합당한 것을 먼저 말하고자 한다.

인민의 평등주의다. 옛적에는 사람을 반상(班常)으로 구별하여 반(班)은 귀(貴)하고 상(常)은 천(賤)하므로 반은 의례히 부(富)하고 상은 의례히 빈(貧)하여 서로 바뀌지 않도록 구분하여 방한(防閑: 못하게 하는 범위)을 정하여 놓고, 영영 이와같이 만들어서, 양반의 피를 타고난 자는 병신·천치라도 윗사람으로 모든 상놈을 다 부리게 하고, 피를 잘못 타고난 자는 영웅·준걸의 재질을 타고났을지라도 하천한 대우를 면치 못하였으며, 또한 노예를 만들어 한번 남에게 종으로 팔린 자는 대대로 남의 종으로 팔려 다니며 우마(牛馬)와 같은 대우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와같이 여러 천년을 살아오다가 다행히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공화(共和)제 이후로 이 사상이 비로소 변하여 반상의 구별을 혁파하고 노예의 매매를 법률로 금하였으니, 이것은 서양문명의 사상이 발전된 결과로서 만세 인류의 무궁한 행복을 가져오게 하였도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반상의 구별 대신에 빈부의 구별이 스스로 생겨서 재산 가진 자는 이전 양반 노릇을 여전히 하며 재물 없는 자는 이전 상놈 노릇을 감심(甘心: 달게 여김) 하게 되었다. 그런즉 반상의 명칭은 없어졌으나 반상의 등분[차별]은 여전히 있어서 고금에 다를 것이 별로 없도다.

하물며 노예로 말하면 법률로 금하여 사람을 돈으로 매매는 못하게 하였으나, 월급이라 하는 보수 명의로 사람을 사다가 노예같이 부리기는 마찬가지라. 부자는 일 아니하고 가난한 자의 노동으로 먹고살며 인간행락(人間行樂)의 모든 호강 다 하면서, 노동자가 버는 것으로 부자 위에 더 부자가 되려고 월급과 삯전을 점점 깎아서 가난한 자는 호구지계(糊口之計)를 잘못하고 늙어 죽도록 땀 흘리며 노력하여도 남의 종질로 뼈가 늘어나도록 사역하다가 말 따름이요, 그 후손이 태어나더라도 또 그렇게 살 뿐이니, 이 어찌 노예 생활과 다르다 하겠는가. 그러므로 공산당의 평등주의가 이것을 없이하여 다 균평하게 하자 함이니, 어떻게 이것을 균평히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거니와, 평등을 만들자는 주의 자체는 옳은 일이니 이는 적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23년 3월 '태평양잡지'(31호) 표지. 표지의 한문 글씨는 이승만 친필 (출처: 김현태, 2016, 『이승만 박사의 반공정신과 대한민국 건국』 비봉출판사, p. 272).
1923년 3월 '태평양잡지'(31호) 표지. 표지의 한문 글씨는 이승만 친필 (출처: 김현태, 2016, 『이승만 박사의 반공정신과 대한민국 건국』 비봉출판사, p. 272).
'태평양잡지' 1923년 3월호(31호) 16쪽 ‘공산당의 당부당’ 텍스트 이미지.
'태평양잡지' 1923년 3월호(31호) 16쪽 ‘공산당의 당부당’ 텍스트 이미지.

공산당 주의 중 부당한 것을 논의하면 다음과 같다.

(1)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함이니, 모든 사람의 재산을 토지 건축 등 모든 부동산까지 합하여 평등하게 나누어 차지하게 하자 함이니 이것은 가난한 사람은 물론 환영하겠지만 토지를 나누어 가진 후 게으른 사람들이 농사를 아니 하든지 일을 아니 하든지 하여 토지를 다 버리게 되면 어찌하겠는가. 부지런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여 게으른 가난장이를 먹여야 할 것이요, 가난장이는 차차 숫자가 늘어서 장차는 저마다 일 아니 하고 얻어먹으려는 자가 나라에 가득할 것이다.

(2) 자본가를 없이 하자 함이니, 모든 부자의 돈을 합하여 공동으로 나누어 가지고 살게 하면, 부자가 양반 노릇하는 폐단은 막을 수 있겠지만 재정가[기업인]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기 어려우리니,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미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 이용후생하는 모든 물건이 다 진보되지 못하며, 물질적 개명이 중지될지라. 자본을 폐기하기는 어려우리니 새 법률을 제정하여 노동과 평등한 세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 나을 터이다.

(3)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이니, 모든 인민의 보통 상식 정도를 높여서 지금의 학식으로 양반 노릇하는 사람들과 대등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가능하거니와, 지식계급을 없이 하자 함은 불가하다.

(4)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이라. 자고로 종교단체가 공고히 조직되어 그 안에 인류 계급도 있고, 토지 소유권도 많으며, 그 속에서 인민 압제와 학대를 많이 하였나니, 모든 구교 숭배하던 나라에서는 이 폐해를 다 알지라. 그러나 지금 새 교회의 제도는 이런 폐단이 없고 겸하여 평등 자유의 사상이 본래 열교확장(裂敎擴張) 되는 중에서 발전된 것이라. 교회 조직을 없이 하는 날은 인류덕의(人類德義) 상 손해가 지대할 것이다.

(5)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사상도 다 없이 한다 함이라. 이에 대하여는 공산당 속에 서도 이견이 많을뿐더러, 지금 공산당을 주장한다는 러시아만 보아도 정부와 지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는 사정을 자기들도 다 아는 바이다. 다 설명을 요구치 않거니와 설령 세상이 다 공산당이 되며, 동서양 각국이 다 국가를 없이하여 세계적 백성을 이루며, 군사를 없이 하고 총과 창을 녹여서 호미와 보습을 만들지라도, 우리 한인은 일심단결로 국가를 먼저 회복하여 세계에 당당하게 자유국을 만들어 놓고 군사를 길러서 우리 적국의 군함이 부산 항구에 그림자도 보이지 못하게 만든 후에야, 국가주의를 없이할 문제라도 생각하지, 그 전에는 설령 국가주의를 버려서 우리 이천만이 모두 다 밀리네어(백만장자)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치 아니할지라.

우리 한족에게 제일 급하고 제일 긴하고 제일 큰 것은 광복사업이라. 공산주의가 이 일을 도울 수 있으면 다 공산당 되기를 지체치 않으려니와 만일 이 일에 방해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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