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제안한 한국·미국·대만·일본 등 4개국의 반도체 동맹 ‘칩4’가 국내 반도체업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사진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20일 방한해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을 시찰한 뒤 한미 반도체동맹을 강조하며 연설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연합
미국이 제안한 한국·미국·대만·일본 등 4개국의 반도체 동맹 ‘칩4’가 국내 반도체업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사진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20일 방한해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을 시찰한 뒤 한미 반도체동맹을 강조하며 연설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연합

정부가 ‘칩(chip)4 동맹’으로 불리는 미국 주도의 반도체 동맹에 참여할지를 놓고 심사숙고 중인 가운데 반도체업계가 그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국·미국·대만·일본 등 반도체 4강의 프렌드쇼어링(동맹국과의 공급망 결속)인 칩4가 반중연대의 성격이 짙은 탓이다. 당위성은 참여 쪽에 기울어 있지만 자칫 연간 100조원 이상의 K-반도체를 수입하는 중국시장이 공중분해될 수도 있어 업계의 속이 타들어 가고 있다.

20일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으로부터 오는 8월말까지 칩4 동맹 참여 여부를 확정해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여러 회의체를 통해 정부의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칩4 동맹은 지난 3월 미국이 한국·대만·일본에 제안한 4자간 반도체 동맹이다. 반도체 강국 4개국이 힘을 합쳐 안정적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이 대외적 목표다. 하지만 미국은 감춰진 속셈이 하나 더 있다. 첨단산업에 필수적인 반도체를 틀어쥠으로써 자신과 대립 중인 중국의 세력확장을 견제하는 게 그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은 반도체를 중국의 숨통을 죌 최고의 무기로 보고 있다"며 "칩4는 지난 5월 한국이 가입한 미국 주도의 경제협력체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이은 중국 왕따 전략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정부가 장고를 거듭 중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참여하면 중국의 경제보복이 두렵고 보이콧하자니 한미동맹이 흔들리는 양수겸장의 처지다. 특히 우리나라는 반도체산업의 구조상 생산과 기술은 미국, 수요는 중국에 크게 의지한다. 어느 한쪽이라도 놓치면 미래 패권은 물 건너간다. 때문에 반도체업계도 이렇다할 의사 표명조차 못하고 속앓이만 하고 있다.

실제 업계전문가들은 다수의 반도체 원천기술을 보유 중인 미국이 칩4 불참을 이유로 한국의 자국기술 활용을 제한하면 첨단 반도체 생산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진다고 말한다. 반도체 장비·소재·소프트웨어 또한 미국·일본 의존도가 높아 한국을 뺀 칩3 동맹이 성사돼 역왕따라도 당할 경우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원도 "인텔·퀄컴 등 파운드리(반도체위탁생산) 공룡고객 대다수가 미국기업이라 메모리에 더해 시스템반도체의 패권을 잡으려면 미국과의 동행이 필수적"이라며 "미국의 반도체 연대에서 빠진 국가는 반도체 생산이 불가능해지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반대로 한국 입장에선 K-반도체의 최대 고객인 중국의 영향력 역시 얕잡아 볼 수 없다. 지난해만 해도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액 1280억달러 중 중국의 비중이 39%(502억달러)에 이른다. 266억달러의 홍콩을 포함하면 비중은 60%(768억달러·100조8000억원)로 커진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반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중국 비중도 각각 30%를 웃돌고 있다. 중국 없는 K-반도체의 비상은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다. 한 반도체업계 관계자도 "칩4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지연시켜 한국의 초격차 지위가 더 오래 유지될 것"이라면서도 "반면 대중 관계 악화로 반도체업계는 물론 국가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예상했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견제구는 이미 들어왔다. 지난 19일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정례 브리핑을 통해 칩4를 미국의 협박외교로 규정하고 사실상 한국의 칩4 참여에 반대한다는 논평을 전한 것이다. 그 전날에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계열매체인 글로벌타임스가 "한국이 (미국의 칩4 동참 요청에) 어떤 답을 할지 미지수지만 압력에 굴복한다면 득보다 실이 클 것"이라는 협박성 글을 기사화하기도 했다.

결국 정부는 한달여 남짓한 시간동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을 해야한다. 섣불리 예단키 힘든 의제지만 다수 전문가들은 칩4 참여 가능성을 높게 본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미동맹이 더 강하고 폭넓게 전개 중인데다 한국 반도체 없이는 중국도 산업발전이 어려워 극단적 대립각을 세우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판단의 근거다. 다만 만일에 대비해 중국의 몽니를 최소화할 설득외교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의 40%, SK하이닉스는 D램의 42%를 중국에서 생산해 현지시장에 대부분 공급한다"며 "안정적 공급을 위해서는 칩4에 가입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리로 중국을 설득해 관계 악화를 막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