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6.25 당일 자유통일 구상
이승만, 6.25 당일 자유통일 구상
  • 글 최응표 한국사바로알리기미주본부 대표/ 영역 남신우 북한인권국제연대 대표
  • 승인 2019.0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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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통수권자는 전쟁초기 3일 어떻게 행동하나? 6월 27일 위무 방송의 오해
[6.25, 69주년 특별기획] [6]

한 국가가 적에게 침공당했을 때 대통령이 군통수권자로서 어떤 결의와 목표를 가지고 전쟁을 이끌어가느냐는 문제는 국가 존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사흘간의 행적에 대해 지금까지도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의혹의 핵심은 이승만이 국민은 나 몰라라 하고 자기 혼자만 도망 쳤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시간대별로 이승만 대통령의 동선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의 남침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25일 아침 10시경이었습니다. 10시 30분경에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구체적인 보고를 합니다.

오전 9시에 개성이 함락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벌써 춘천 근교에 도달했다는 충격적인 보고였습니다. 기절을 열 번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침착하게 전쟁의 원칙과 목표를 설정합니다. 바로‘국가 수호를 위한 전쟁 목표 4원칙’이었습니다.

내용을 보면

◇6.25 당일, “이제 3.8선은 필요없다. 북진통일이다.”

1.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이 세계 대전의 빌미를 제공하는 장(場)이 되어서는 안 된다. 2. 한국민은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총력전을 펼친다. 3. 북한의 불법 남침을 남북통일의 절호의 기회로 삼는다. 해방 후 미·소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어진 38선은 북한이 먼저 침범했기 때문에 이제 필요 없어졌다. 4. 위기를 타개하고 북진 통일을 위해서는 미국과 유엔의 지원이 필요하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그어진 38선은 북한이 먼저 침략을 했기 때문에 무효가 되었으니 침략자를 퇴치하고 국토를 통일하여 자유 민주 국가를 수립한다는 원대한 구상을 할 정도로 전략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그때부터 정말 바쁘게 움직입니다. 하와이에 머물던 구축함 3척의 조속한 귀국 지시를 시작으로 11시 반경엔 무초 대사와 만났고 1시에는 미국 지원 요청을 지시했으며, 2시에는 긴급 국무 회의를 열어 미국에 무기와 탄약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미 극동군 사령부에 전투기 지원 요청을 하고 무초 대사와 밤 10시에 다시 만난 후 국방장관에게 군사경력자 회의 지시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때 이승만을 만난 무초 미국 대사는 “대통령은 상당히 긴장한 듯 보였으나 태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고 본국에 보고했다고 합니다.

6월 26일 새벽 3시에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들 미국의 책임이 막중하니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며 촉구했고 맥아더로부터 무스탕 전투기 10대, 105mm 곡사포 36문, 155mm 곡사포 36문과 바주카포를 긴급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이어 워싱턴의 장면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적이 우리 문전에 와 있는데 미 의회가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재한 1천만 달러 무기 지원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하라고 지시합니다. 26일 오후 2시에는 직접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로 나가 상황을 보고받습니다.

26일 오후 2시,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자 정부 각료들이 대통령의 피난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합니다. 26일 밤 9시 김태선 서울시경 국장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는 수천 명의 공산분자들이 탈옥하면 제일 먼저 경무대로 올 것이므로, 일시 피난을 해서 전쟁의 전반을 지도해야 한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27일 새벽 2시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 등이 경무대로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사태의 급박성을 보고하면서 간곡하게 피난 건의를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시민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안 돼! 서울을 사수해야 돼! 나는 떠날 수 없어!”라고 말하고는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각하 “청량리까지 적 탱크가 들어왔습니다.”

조병옥은“ 각하의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라며 프란체스카 여사를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더 크게 고함을 지를 뿐이었습니다. 그때 경찰 간부 한 사람이 들어와서 적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메모를 전하였습니다.

북한군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면 더 지체할 수 없는 상황, 할 수 없이 이승만 대통령은 남하를 결정하게 됩니다. 실은 북한군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정보는 사실이 아니었고 대통령의 피난을 재촉하려는 참모들의 꾀였다고 합니다. 국가 원수가 적에게 생포되거나, 살해되는 사태는 곧 국가 파멸을 의미합니다.

이런 비극적 사태를 바라는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렇게 완강히 버티던 대통령도 적의 탱크가 수도 서울을 향해 진격 중이고 적의 포탄이 당장이라도 경무대에 떨어질 순간이 되자 주위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7일 새벽 3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은 기관차와 3등 객차 2량으로 만들어진 특별 열차로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열차의 차창은 깨지고 좌석의 스프링은 튀어나온, 고물도 그런 고물이 없었습니다.

차에 오르며 대통령은 혼잣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서울시민들과 같이 죽더라도 남아서 싸워야 할 텐데... 그러나 대통령이 잡힐 것 같으면 다 되는 거야.” 이렇게 서울을 떠난 이승만은 대구까지 갔다 다시 대전으로 올라와 임시 관저인 충남지사 관저로 갔습니다.

그날 밤 대통령을 찾아온 무초 대사는 유엔안보리에서 소련이 불참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한 경위와 미국의 적극 개입 방침을 설명 했습니다. “유엔 안보리에 소련이 불참한 것은 정말 럭키 찬스(lucky chance)입니다. 하나님이 한국을 버리지 않은 증거입니다. 전쟁은 이제부터 각하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이 말에 힘을 얻은 이승만은 국민을 안심시키고 국군의 사기를 북돋우는 방송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공보처장과 상의한 후 서울 중앙 방송국으로 전화를 해 6월 27일 밤 10시에 방송을 하기로 했습니다. 내용은 유엔과 미국이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고 지금 공중과 해상으로 무기, 군수품을 날라와 우리를 돕기 시작했으니 국민들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중앙 방송에서는 이 연설을 디스크에 녹음해 그대로 방송했습니다. 후에 서울에서는 방송 목소리가 작아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장거리 전화를 통한 방송이니 그럴 수밖에요. 방송이 나가는 도중 방송국은 철수를 시작했고 방송이 끝났을 때는 밤 11시를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방송국 직원, 대통령 녹음연설 걸어놓고 철수

방송국 직원들이 철수를 했는데 어떻게 방송이 나갈 수 있냐고요? 27일 당번 아나운서가 밤 11시쯤 대통령의 담화 디스크를 걸어 놓고 방송국을 나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대통령이 시민을 버리고 도망했다는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담당 아나운서의 실수로 인해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방송 디스크를 내려놓고 갔어야 했지만 적군이 들이닥치는 다급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는 어려웠겠지요. 실제로 북한의 무장 공작대가 방송국을 점령한 시간은 28일 새벽 2시라고 합니다. 방송국 직원들은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간 것이죠.

남침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사흘간 행적을 보면 대통령으로서, 국가 원수로서, 통수권자로서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수행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꼭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했습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한국 정부의 해외(제주도 포함) 이전 (또는 망명)과 일본군의 참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앞에서 말한 대로 통일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의 위기가 한반도 문제를 항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best opportunity)가 될 것으로 여겼습니다. 전쟁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벌써 한반도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전쟁을 가볍게 본 것이 아니라 이미 김일성이 38선을 먼저 파기했으니 이참에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그 생각의 출발점이 바로 전쟁 당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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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

When a nation is invaded by an enemy force, how a president - as the commander-in-chief of the military – acts with determination and objectives and executes the war, plays a decisive effect on the fate of the nation. Some people raised allegations against President Syngman Rhee at the breakout of the Korean War on June 25, 1950, regarding his records during the first three days.

The point of these allegations is that President Syngman Rhee fled without caring the safety of the citizens of South Korea. Was it really true? We will trace his whereabouts in a timeline sequence. President Rhee first heard about the invasion by the North Korean forces, around 10 a.m. on June 25th.

Around 10:30 a.m., the Minister of Defense, Shin Seong Mo, reported to the President more detailed reports: Around 9 a.m., the City of Kaesong fell, and the shocking news was that the North Korean forces, led by tanks, were already approaching the outskirts of Choon Cheon City.

In a situation when a faint heart would have passed out ten times upon hearing such calamity, President Rhee instead calmly established the war’s basic principles and objectives. That was, ‘The Four Principles of the War Objectives for the Defense of the Country.’

The four principles were: 1. The war breaking out in Korea must never be the excuse for a greater worldwide war. 2. The war should be an all-out total war which all South Koreans shall be engaged in. 3. Through North Korea’s illegal invasion of the South, they will see this as the perfect opportunity to unify the Korean Peninsula on their terms. The artificially drawn 38th Parallel by the U.S. and USSR following the surrender of Japan is no longer valid, since North Korea invaded South Korea illegally without any provocations. 4. To overcome the current crisis and to unify the North under South Korea’s terms eventually, aids from the U.S. and the U.N. will be needed.

Even in the tense situation, President Rhee possessed the strategic perspective of a far-reaching plan in that, since the North invaded by crossing the 38th Parallel first, drawn up by the U.S. and the U.S.S.R. after Korea gained independence from Japan, and with the invasion thus invalidating the artificial line, this required the need to kick out the invaders and reunifying the land and establishing a free and democratic nation. The President then moved very quickly.

He ordered three destroyers visiting Hawaii to immediately sail for home, and around 11 a.m., met with the U.S. Ambassador John J. Muccio. At 1 p.m., he ordered to place the official request for help to the United States, and at 2 p.m., he convened an emergency meeting of the National Assembly and requested the help of the U.S. for weapons and ammunitions.

And later that afternoon, he requested the U.S.’s Far East Command’s Headquarters, for fighter planes and then met with Ambassador Muccio again later in the evening at 10 p.m. After the meeting, he ordered his Minister of Defense to convene a meeting of senior military officers and took other measures.

After meeting with President Rhee, Amb. Muccio reported back to Washington that, “the President looked tense, but he did not lose his calm attitude.” At 3 a.m. in the morning on June 26th, President Rhee called Gen. Douglas MacArthur in Tokyo and said, “The responsibility of the United States has never been greater!

So please come and save Republic of Korea!” and urged him, and received a promise from Gen. MacArthur that he would send an emergency help of 10 Mustang fighter planes, 36 pieces of 105 mm howitzers, 36 pieces of 155 mm howitzers, and bazookas also.

Soon after, he called South Korea’s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Myeon Jang, and said “the enemy is at our doorstep, so what is going on with the $10 million in weapons aid approved by the U.S. Congress and President Truman?’ and directed Ambassador Jang to deliver his message to President Truman.

At 2 p.m. on the 26th, President Rhee went to the Army Headquarters and the Security Department’s Situation Room and received updates. At 2 p.m. on the 26th, as the gateway to Seoul, Uijeongbu, fell to the North Korean forces; the cabinet ministers began to discuss the issue of the evacuation of President Rhee.

At 9 p.m., the Chief of the Seoul Metropolitan Police, Kim Tae Sun, reported that if the thousands of communists held in the Seodaemun Prision were to break out free from the jail, they would head first to the Presidential Palace, which was called the Gyeongmoodae at the time, and that the President must evacuate immediately in order to direct the war.

Just as President Rhee fell asleep at 2 a.m. on the morning of the 27th, Defense Minister Shin Seong Mo, Mayor of Seoul Lee Ki Boong, and Cho Byung Oak all hurriedly arrived at the Gyeongmoodae. They all said, “Your Excellency, the situation is critical. You must evacuate now!” and pleaded with him, but President Rhee said, “You are telling me to give up and leave Seoul?

Then what about the citizens of Seoul? No way! We must defend to the last, this city Seoul! I cannot leave!”, and then went back to his room and shut the door. Cho Byung Oak said “the President’s stubbornness must be broken,” and tried to convince First Lady Francesca.

However, Pres. Rhee just shouted back, “Who said such a thing?” At that moment, a high-ranking police official came in and delivered a memo that reported that the enemy tanks were now entering into Chungryangri. If the North Korean tanks were now entering Chungryangri, it was no longer a situation that could be delayed any further.

Facing no other choice, Pres. Rhee decided to head to south, away from Seoul. According to later sources, the news of the North Korean tanks entering Chungryangri was not true, but rather a ruse by his aides to urge the President to evacuate. The head of state captured by the enemy or assassinated, means the destruction of that country.

There are no citizens of any nation that would wish for this kind of tragic event to occur. Even a president who so stubbornly stood his ground against evacuation, finally gave in only when he was told that the enemy tanks were heading towards Seoul and that the enemy shells were literally about to explode over Gyeongmoodae and finally heeded the advice of those around him.

At 3:30 a.m. on the 27th, President Rhee boarded a special train consisting of a locomotive and two third class cars and headed south. There was nothing ‘special’ about the train, which had broken windows and seats with broken springs breaking through the fabric; it was truly an antique train.

It’s been reported that President Rhee muttered to himself as he boarded the train, “Even if I were to die along with the citizens of Seoul, I should remain and fight on… But if the President is at risk of getting captured, it’s all over.” This is how President Rhee left Seoul, and he went south to Daegu, before coming back up north to Daejun and going to the temporary Presidential residence at the South Choongchung Province Governor’s residence.

That night, Ambassador Muccio came to see the President and explained the situation that unfolded at the U.N., where the Soviets boycotted the Security Council meeting, thereby not exercising their veto rights, and also explained America’s course of intervention in the war.

“The Soviets boycotting the Security Council meeting was really a luck. It is a proof that God has not forsaken South Korea. The war now is no longer just Your Excellency’s war, but it is now our war.” President Rhee gained much confidence from these words, and decided that in order to calm the citizens and boost the morale of the troops, he would do a radio broadcast.

After consulting with the Minister of Information, President Rhee called the Seoul Central Broadcasting Station and a broadcast time was set at 10 p.m. on the 27th of June. The content of the radio broadcast would be, “The United Nations and the United States have decided to help us and fight in this war.

Right now, through the air and sea, weapons and military supplies are coming to us and have started to help us, so even though the citizens may be suffering, if we stoically endure, we will be able to vanquish the enemy, so rest assured.” The Central Broadcasting Station recorded this straight onto a record disc and broadcast it.

Later on in Seoul, because the voice in the recording sounded weak, many thought it strange. However, the call for the broadcast was made through a longdistance call, so it was only natural that President Rhee’s voice sounded faint. As the broadcast was going out, the radio station began to evacuate, and when the broadcast ended, it was past 11 p.m. in the evening.

How could the broadcast continue if the staff of the radio station evacuated the building? The announcer on duty on the 27th put the recording of the President’s talk on broadcast, and left. That is why there was the misunderstanding that the President fled the capital abandoning the citizens behind. It was a mistake by the announcer on duty.

He should have taken that recording disc from the broadcasting mode. In fact, the North Korean army advance unit came and occupied the broadcast studio on the 28th at 2 a.m. The announcer left the studio just in time not to be captured by the North Korean army.

If we look at President Syngman Rhee’s record three days after the invasion of South Korea, he clearly and precisely carried out his duties as President, as the head of state, and as the commander-in-chief. President Rhee stated that he must clearly differentiate from what he himself must do and what he must not do.

The things that he decided he must not do was moving the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overseas (including to Jeju Island); going into exile; allowing the Japanese military to enter the war. Then, what were the things that he must do? As previously mentioned, it was reunification.

President Rhee considered that the crisis of the invasion of South Korea presented the best opportunity for permanently solving the problem of the Korean Peninsula. It means that, in a situation where there was no idea how the war would progress, President Rhee was already mindful of the re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He did not view war lightly, but rather, thought that since Kim Il Sung already breached the 38th Parallel, this was the opportunity to carry out reunification. This mindset was birthed on the day of the start of the war.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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