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⑥ 들불처럼 번져간 학생운동의 두 갈래-정치투쟁과 민중지원투쟁

‘반미·반정부 시위’ 격화되자 전두환 정권 83년 말 ‘학원자율화 조치’
84년부터 ‘기층 민중으로 투신’하는 노학연계 민중지원투쟁 강화
85년 4월 19일 ‘삼민투위’ 美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큰 반향 일으켜

1982년 3월 18일 학생운동에 충격을 안겨준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고신대생 문부식·김은숙 등은 문화원에 불을 지르고 "미국은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고 주장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1982년 3월 18일 학생운동에 충격을 안겨준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고신대생 문부식·김은숙 등은 문화원에 불을 지르고 "미국은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고 주장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1982년 들어 폭발적 성장하던 학생운동에게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 일어났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3월 18일 고신대생 문부식, 김은숙 등이 부산 미문화원에 불을 지르고, "미국은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고 주장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이 사건은 사회에 충격을 안겨주었고,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그것은 방화사건을 일으킨 주모자들이 부산시민들의 신고에 의해 붙잡힌 경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휘발유 통을 맡겼던 한영식당의 아주머니가 고신대 학적부를 뒤져 문부식, 김은숙 두 사람을 지목한 것이다. 또, 방화자 중 한명인 이미옥의 옆집에서 이미옥을 신고했다.

그럼에도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은 5.18 이후 불붙기 시작한 학생운동의 반미투쟁의 일환이었다. 80년 12월과 82년 11월 일어난 1, 2차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 82년 4월 강원대 성조기 소각사건, 그리고 85년 5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그리고 86년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 결성, 88년 반미청년회의 서울미문화원 점거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82년 학생운동은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의 충격으로 잠시 위축된 듯이 출발했지만, 81년부터 정비된 학생운동 조직들은 늘어난 학생 수 만큼이나 성장하고 팽창했다. 학교마다 언더 서클, 단과대 학도호국단, 학회, 등의 조직이 활성화되고, 서울대, 연대, 고대, 성대 등 대학 간 연락체계도 만들어졌다.

활성화된 조직체계와 대학 간 연대투쟁은 9.24 종로 가두시위와 10월 초 영등포의 원풍모방 파업지원 가두시위로 나타났다. 그 중 1만여 명이 참여한 9.24 종로 가두시위는 국민적 분노가 일고 있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에 대한 규탄이었기에 대학생들의 참여도 높았고, 국민적인 호응도 컸다.

◇학생운동의 투쟁력 회복

82년 학생운동은 투쟁력을 완전히 회복하고, 대중적인 확장기를 맞게 된 것이다. 동국대의 시위에서는 80년 10.27 법난으로 피해를 당한 승려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했으며, 캠퍼스 수원이전을 반대하던 경희대의 시위는 쇠파이프로 무장한 사복경찰의 투입으로 인해 ‘전두환 타도’를 외치는 반정부 투쟁으로 비화되었다.

전남대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검거된 총학생회장 박관현의 옥중 단식 사망사건이 발생하여 1주일 동안 1만 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또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이하여 각 대학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저녁에는 종로에서 연합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이대에서는 경찰에 의해 연행되던 주동자 임규완을 여학생들이 달려들어 구출하기도 했다.

학생운동에서 81년이 회복기였다면, 82년은 성장기였다. 그리고 83년의 학생운동은 질풍노도의 시간이었다. 각 대학의 이념서클과 학회는 학생운동 활동가들로 넘쳐났다. 학생들의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총 학도호국단과 단과대 학도호국단은 학생운동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고, 대학신문, 방송도 운동권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3년 12월 21일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후 제적됐던 학생들이 돌아와 복교대책위가 구성되면서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은 1983년 12월 21일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후 제적됐던 학생들이 돌아와 복교대책위가 구성되면서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경찰이 대학에 상주하였으니, 대학 캠퍼스는 매일같이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 같은 상황이 되었다. 학기별 1회 정도 일어나던 시위가 매달 벌어졌고, 축제 마지막 날에는 수천 명씩 모여 시위를 했다. 2학기에는 연세대에서 연고전을 취소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철야농성으로 이어졌고, 이를 사찰하던 안기부원이 학생들에게 감금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83년 9월에 김근태 의장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년)이 만들어지고, 대학 간에는 상설적인 비공개 연계조직이 만들어졌다. 지방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학 간 연락체계가 만들어졌다.

9월 서울대에서는 도서관에서 시위를 주동하던 황정하가 추락해 숨졌으며, 부산대에서는 나무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던 허근을 경찰이 마취 총을 쏘아 연행하였다. 그리고 11월 11일에는 종로에서 레이건 방한을 반대하는 최대의 연합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이처럼 질풍노도와 같은 학생운동의 질주에 전두환 정권은 새로운 대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80년 5월 17일 이후 3년간 제적당한 대학생은 65개 대학 1,363명으로 박정희 정권의 유신 7년 동안 구속된 786명의 두 배에 달했다. 83년 한해만 해도 구속자가 327명에 달했다. 심지어 11월에는 1단 크기의 시위기사로 신문사회면 전체가 채워지는 날도 있었다.

해외의 외신들은 한국의 대학가 시위를 연일 보도했고, 대한민국은 인권 탄압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인의 축제인 86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을 치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전두환 정권은 83년 12월 21일에 학원자율화 조치를 취하고 제적생들의 복교 허용했다.

◇전두환 정권, 학원자율화 조치로 대응

대학에서는 갑작스런 학원자율화 조치로 잠시 어리둥절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캠퍼스 잔디밭을 점거하고 있던 경찰 무리들이 사라진 풍경은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리둥절한 상황도 잠시, 제적되었던 대학생들이 돌아와 복교대책위가 구성되면서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84년 9월 고려대에서 5.17 비상계엄 확대 이후 첫 총학생회가 만들어지고, 서울대 연세대 등에서 잇달아 총학생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10월 24일 서울대에서 총학생회장인 이정우를 제명하자 학생들이 중간고사를 거부하였고, 경찰이 학내로 진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어 11월 3일 학생의 날의 맞아 연세대에서 전국학생대표기구(민투학련)가 만들어졌고, 연합시위와 철야농성이 벌어졌다.

이어 11월 14일, 총선을 앞두고 집권여당인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 농성사건이 벌어졌다. 애초 서울대, 연대, 고대, 성대생 등 400여 명이 참여하려 했던 농성계획은 서울대생들이 빠진 채 264명이 관훈동에 있던 민정당 중앙당사 9층 강당을 점거하고 당 대표와의 면담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경찰은 해머 등으로 벽을 부수고 병력을 투입하여 264명 중 263명을 연행했다(연세대생 1명은 머리를 들지 못한 채 구타당하며 지하보일러실까지 내려갔다가 근무원의 도움으로 탈출). 이 사건으로 신준영(연세대), 이재권(고대), 이기호(성대) 등 현장지도부와 배후로 서울대 연대, 고대, 성대 총학생회장 등 17명이 구속되었고, 연행자 전원이 구류 25일 이상의 처벌을 받았다.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민중지원투쟁 강화

84년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 노학연계를 시도하는 민중지원투쟁이 강화되었다. 5월 25일에는 서울대 고대생들이 가리봉 5거리와 부천역 등에서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또, 연세대생들은 한강 홍수로 피해를 입은 난지도와 목동에서 홍수피해를 입은 이재민들과 함께 정부의 홍수대책을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어 10월 12일에는 동대문과 3.1 고가도로에서 전태일의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를 지원하는 연합시위가 벌어졌다. 대학생들은 연합가두시위를 벌이며 동대문 로터리를 점거했고, 일부 연세대생과 고대생들은 3.1고가도로를 점거하여 시위를 벌이다 전원 연행되기도 했다. 이후부터 대학가 시위에 화염병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2.12 총선을 앞둔 84년 말에는 미국에 가 있던 김대중 씨가 귀국하게 되었다. 이어 김영삼, 김대중이 주도하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만들어지고, ‘민한당’과 대별되는 신민당이 만들어졌다. 이어 치러진 총선에서 신당 돌풍이 일어났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이후 억눌렸던 민중들의 마음이 신민당 현판식과 총선 유세장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1985년 2.12총선에서 신민당이 승리하면서 노동자, 농민, 철거민 등 민중들 사이에서 시위와 투쟁이 잇달았다. 84년 홍수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재개발을 앞둔 목동의 철거민들이 철거반대투쟁을 벌였고, 경동산업과 성원제강, 동국제강 등에서 노조결성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리고 부평의 대우자동차에서 파업투쟁이 벌어졌다. 대학생 신분을 속이고 대우차에 들어간 학생운동 출신 송경평, 박재석 등이 벌인 파업은 학생 운동가들에게 ‘기층 민중으로의 투신’이라는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때부터 대학생 신분을 속이고 공장에 들어가는 ‘위장취업’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1984년 11월 14일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 농성사건이 벌어졌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총학생회장 등 17명이 구속되었고 연행자 전원이 구류 25일 이상의 처벌을 받았다.
1984년 11월 14일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 농성사건이 벌어졌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총학생회장 등 17명이 구속되었고 연행자 전원이 구류 25일 이상의 처벌을 받았다.

85년 6월 대우자동차 파업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고, 구로지역의 대우어페럴(위원장 김준용) 등 노조간부 3인이 구속되자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 1400명이 동맹파업을 벌였다. 그리고 이어 남성전자, 세진전자, 롬코리아 등 2500명의 노동자들이 지지농성투쟁을 벌였고, 삼성제약과 청계피복노조 등이 가두투쟁을 벌였다.

여기에 재야민주화세력인 ‘민통련’과 ‘전학련’이 성명을 내고 지지농성을 벌였고, 농민단체들도 노조탄압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구로 동맹파업으로 43명이 구속되고, 38명이 불구속, 47명이 구류 선고를 받고 1500명이 해고되었다. 구로 동맹파업은 한국전쟁이후 최초의 노동자 정치투쟁이자 파업이었다.

◇삼민투 결성,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벌이다

신민당의 돌풍과 승리는 학생들의 투쟁 열기도 고조시켰다. 1985년 4월 17일 학생들은 전국 학생들의 대표조직으로서 ‘전국학생총연합(전학년, 의장 김민석)’과 상설적인 투쟁조직으로서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투쟁위원회(삼민투위, 위원장 허인회)’를 결성하였다.

4월 19일 전두환 방미반대를 내걸고 종로에서 연합시위를 했던 학생운동은 5월 23일에는 삼민투위 주도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성균관대 등 5개 대학 73명이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학살의 진상 규명과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의 미문화원 점거농성은 국내와 해외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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