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獨수상 좌지우지한 간첩 '기욤 사건' 남의 일 아니다
西獨수상 좌지우지한 간첩 '기욤 사건' 남의 일 아니다
  • 최영재 기자
  • 승인 2017.11.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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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 비서 '귄터 기욤 사건'··· 정책 결정까지 개입
통일 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과 비서직을 수행하며 간첩질을 한 권터 기욤(오른쪽).
통일 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과 비서직을 수행하며 간첩질을 한 권터 기욤(오른쪽).

 

분단 독일에서 동서독 화합 정책을 펼치던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임 계기가 된 1974년 ‘기욤 사건’은 남북 대치 상황에서 국가 정보 당국의 대공수사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해주는 중요한 사례다.

귄터 기욤(Günter Guillaume、죽을 때의 성은 부레-르(Bröhl)、1927년 2월1일∼1995년 4월10일)은、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스파이로 서독 총리 브란트의 비서가 되어 서독의 국가기밀을 지속적으로 동독에 빼돌렸고 총리의 국가정책 결정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 역사상 가장 성공한 스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74년 발각되어 브란트 총리가 사임하게 되었다.

기욤은 음악가의 아들로서 1927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독일공군의 대공포 조수로 근무했다. 역사가인 겟츠・아리의 최신의 연구에 따르면 기욤은 1944년에 나치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종전 후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와서、사진가로서 일했다.

기욤은 1950년 동베를린에서 ‘인민과 세계’사의 편집원이 되었다. 그 해부터 1956년까지、기욤은 동독의 국가보안성(Stasi, 슈타지)에 발탁되어 서독 잠입 훈련을 받았다. 1951년、같은 슈타지 공작원교육을 받고 있던 비서인 크리스텔 봄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1남을 얻었다.

◇서독 잠입

1952년 기욤은 동독의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에 입당했다. 1956년 슈타지의 지령을 받고 신분을 감추고 망명을 가장하여 서독으로 이주하여 프랑크푸르트에 살며 찻집을 경영했다.

그는 1957년 서독의 독일사회민주당(SPD)에 입당했다. 아내인 크리스텔은 같은 당 헤센(Land Hessen) 남부지구 사무소의 비서가 되었다. 기욤은 1964년부터 SPD의 지도원으로 정치활동에 종사했다. 이후 프랑크푸르트지구의 당사무국장이 되어 1968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시의회 SPD의원단의 사무국장이 된다.

사진 외쪽 뒤의 선글래스를 쓴 권터 기욤. 빌리브란트 수상을 그림자 처럼 수행했다

 

같은 해 기욤은 시의회 의원에 당선됐다. 다음해 독일연방회의선거 때에는 지역 선거구의 SPD후보인 게오루크 레버 연방교통장관의 선거전에 종사하여 높은 득표를 얻어 조직운영의 재능을 발휘했다.

이 선거운동을 계기로 레버의 추천으로 기욤은 연방총리부의 경제・재정・사회정책 담당비서가 되어、빌리 브란트 총리의 신뢰를 쟁취했다. 1972년 기욤은 근면함과 사무능력을 인정받아 브란트의 개인비서가 된다. 결국 기욤은 서독 총리의 극비문서와 내부 회의 내용, 더 나아가 사생활까지 알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기욤 사건

이미 1973년 중반부터 서독의 방첩기관은 기욤 부부의 첩보활동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증거를 잡아 체포하는데까지는 1년이 걸렸다. 1974년 4월24일 기욤 부부는 본의 자택에서 스파이혐의로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기욤은 “나는 동독 국가인민군 장교이며、국가보안성 직원이기도 한다. 장교에 대한 예우를 바란다...(Ich bin Offizier der Nationalen Volksarmee der DDR und Mitarbeiter des Ministeriums für Staatssicherheit. Ich bitte, meine Offiziersehre zu respektieren.)”고 말했다.

 

이 사건은 그의 성을 따라 ‘기욤 사건’으로 불렸고 서독의 내정에 심각한 후폭풍을 불렀다. 결국 같은 해 5월7일、빌리 브란트 총리는 사임했다. 6월6일、야당의 동의에 따라 연방의회에 사건의 전모해명을 위한 조사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에 의하여、서독 치안기관의 감시체제 취약점이 밝혀졌다. 1975년 12월 기욤은 국가반역죄로 징역13년、아내인 크리스텔은 징역 8년의 판결을 받았다。

이후 기욤 부부는 1981년、동서독간의 스파이 포로교환으로 동독으로 돌아가 영웅이 되었다. 기욤은 동독에서 공식으로 ‘평화의 정찰자’(Kundschafter des Friedens)로 표창받았다. 부부는 칼 마르크스훈장을 받았으며、기욤은 국가보안성 대좌、크리스텔은 중좌로 승진되었다. 기욤은 또 슈타지의 공작원양성학교 명예객원교관으로 초빙되었다.

최영재 기자

sopulg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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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처사 2017-12-02 22:31:09
언제부턴가 이젠, 간첩이 없을 거란 생각이 사람들을 지배했죠. 간첩이 있어봐야 뭘 제대로 하겠냐는 인식까지 있었죠. 이런 인식이 이석기를 만들었겠죠. 여기에 대공수사력이 약해지거나 사라진다면 어리버리 간첩도 간첩질을 제대로 하는 나라가 되겠죠, 대한민국은.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