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⑦ 수면위로 올라온 반미운동

82년 부산 美문화원 방화...“美, 신구부 쿠데타 방조·광주학살 용인” 주장
85년 삼민투위 주도 서울대 등 5개 대학 73명 서울 미문화원 기습 점거
학생운동 발전 과정, ‘반미자주화→반체제 통일→친북·종북 주사파’

1985년 5월 23일 전학련 투쟁기구인 삼민투위 소속 학생 73명이 서울 미 문화원을 기습점거한 뒤 주동자인 삼민투 공동대표 함윤경이 창 바깥으로 몸을 내밀고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1985년 5월 23일 전학련 투쟁기구인 삼민투위 소속 학생 73명이 서울 미 문화원을 기습점거한 뒤 주동자인 삼민투 공동대표 함윤경이 창 바깥으로 몸을 내밀고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82년 3월, 전두환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폭발적으로 성장한 학생운동이나,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는 일이 일어났다. 개학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부식과 김은숙 등 고신대 생들에 의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전두환은 집권한 뒤 서둘러 미국 방문을 추진했다. 이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따른 미국 조야의 비판적 분위기를 불식시키고 미국의 지지를 획득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81년 2월 전두환은 미국을 방문하여 한미동맹관계를 확인하면서, 제5공화국의 정당성을 선전하려고 했다.

이러한 전두환 정권의 움직임에 미국이 동조하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미국이 군사독재정권을 비호한다’는 비판 의식을 확산시켰다. 이에 82년 3월 18일 부산의 고신대 학생들인 문부식, 김은숙, 김화석, 박정미 등은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를 방조하고 광주학살을 용인한 것을 비판’하면서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하였다.

불타는 부산 미문화원

그들은 미 문화원을 방화하면서 "미국은 남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유인물을 살포했다. 방화 과정에서 책을 보던 동아대생 장덕술이 사망하였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수사기관에 비상 근무령을 내리고 김화석, 이미옥, 최충언, 박원식, 최인순 등을 검거하고, 문부식과 김은숙을 수배했다.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한 후, 천주교 원주 교구에 은신해 있던 문부식과 김은숙은 원주교육원 원장인 최기식 신부 및 한강성당 주임을 맡고 있던 함세웅 신부와 자수 문제를 상의한 끝에 4월 1일에 자수했고, 방화범 3명, 유인물 살포자 3명, 의식화 학습에 동참한 3명 등 11명이 검거되었다.

또한 4월 2일에는 5·18 때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김현장이 배후조종한 혐의로 검거되었으며, 최기식 신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검거되는 등 15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계엄령, 현주건조물방화치사상,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에서 최고 사형(문부식, 김현장)까지 선고받았다.

여기에 방화 사건과 무관한 최기식 신부를 비롯해 원주 교구 인사들이 구속되어 천주교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4월 11일 김수환 추기경이 부활절 강론에서 정부에 항의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이 항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화염에 휩싸인 부산 미 문화원의 모습도 충격적이었지만, 반미=간첩의 등식이 없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부산의 학생운동 세력이 그 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국민들에게나 대학생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 문화원, 반미운동의 표적이 되다

하지만, 이것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한 반미감정의 소산이었다. 즉, 이보다 먼저 광주에서는 5.18 직후에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80년 12월 9일)이 있었고, ‘부미방’ 이후 2차 방화사건(82년 11월)이 있었다. 1차 방화사건은 정순철, 김동혁, 박시형, 윤종형, 임종수 등과 대학생들이 벌인 사건이다.

이들에게 미국은 ‘배신자’들이었다. 5월 26일 광주민주화운동의 최종진압작전을 앞두고 항쟁 대책본부는 "지금 부산 앞바다에는 미 항공모함 두 대가 정박해 있다"며, "잔인무도한 저들의 살육을 방지하고 광주시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왔으니, 시민여러분들은 안심하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미국은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고, 광주시민과 학생운동의 배신감은 컸다.

1980년 5월 광주사태 이후 미국의 비판적인 여론을 달래고 지지를 받기 위해 1981년 2월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레이건 미 대통령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사태 이후 미국의 비판적인 여론을 달래고 지지를 받기 위해 1981년 2월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레이건 미 대통령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하지만, 신군부는 반미의식의 확산과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사건을 은폐했다. 처음엔 방화가 아닌 전기누전으로 발표했다가, 범인이 잡힌 뒤에는 부랑아들의 소행으로 몰고 갔다. 따라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1차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통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의 책임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처럼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80년대 초반 반미운동이 지속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80년 12월 제1차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 82년 3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82년 4월 강원대 성조기 소각사건, 82년 12월 2차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 85년 삼민투위에 의한 서울미문화원 점거사건, 86년 NL계열로 첫 등장한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 결성, 88년 반미청년회의 서울미문화원 점거사건으로 이어진다.

강원대 성조기 소각사건은 ‘부미방’ 사건의 검거선풍이 한참이던 4월 2일 강원대에서 일어났다. ‘부미방’ 사건으로 위축된 서울의 학생운동에 비해 원주교구가 있던 강원도에서 일어난 것이다. 김래용, 이헌수 등 강원대생 4명과 송민석(성결대)이 "부산의 학우들을 투쟁을 적극 지지한다"며 미국의 성조기를 불사르고 시위를 한 사건이다.

또, 1985년 5월 23일에는 각 대학 총학생회 연대기구인 전학련(전국학생총연합, 의장 김민석) 산하 투쟁기구인 삼민투위(三民鬪委 민족 민주 민생 투쟁위원회, 위원장 허인회) 주도하에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성균관대 등 5개 대학 73명이 서울 미문화원을 기습 점거하고 3일간 농성을 벌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84년 민정당 중앙당사 농성사건, 김대중의 귀국과 김영삼, 김대중의 ‘민추위’ 결성, 2, 12총선에서 일어난 신민당의 바람에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즉, 84년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방향을 잡지 못하고 힘겨워하던 학생운동이 2.12 총선을 전후로 한 야권의 신당바람에 힘입어 전학련이라는 총학생회 연대기구가 발족시키고 점거를 감행한 것이다.

특히 85년 들어 각 대학은 이전의 한시적 투쟁기구와 달리, 상설적인 투쟁 기구를 만드는 바람이 일었다. 그것이 민족, 민주, 민생이라는 3가지 사안을 분리하고 전담 투쟁 기구를 만드는 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총학생회 연합인 ‘전학련’과 투쟁연대기구인 ‘삼민투위’로 나타난 것이다.

5개 대학 73명,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하다

학기 초 전두환 방미를 반대하는 투쟁(85. 4. 19)을 전개하다가, 광주민주화운동 기간을 맞아 미국의 책임을 폭로 규탄하기 위해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한 것이다. 처음엔 미 대사관을 고려했으나, 위험성 때문에 미문화원으로 돌려 점거에 들어갔다. 그들은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는 구호를 내붙이고 주한 미 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1985년 5월 서울 미 문화원 점거농성 중이던 삼민투위 소속 학생들이 3일간의 농성 끝에 자진해산하며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1985년 5월 서울 미 문화원 점거농성 중이던 삼민투위 소속 학생들이 3일간의 농성 끝에 자진해산하며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처음엔 민정당 중앙당사 농성처럼 곧바로 연행되어 장시간(3일, 72시간) 농성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치외법권 지대인 미 문화원에 경찰을 투입할 수 없어 어쩌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농성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음식물 외부반입이 차단되고 탈진하는 학생들이 나오자, 3일 만에 스스로 농성을 풀고 경찰에 연행됐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 삼민투위원장인 함운경 등 20명이 구속 기소되었고, 사법사상 초유의 재판거부사태, 묵비권행사, 재판부기피신청, 변호인단 전원 사임 등의 사태가 벌어졌다. 또,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과 달리 대학생들이 공개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정부의 태도를 공식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국내외에 주목을 끈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윤성민 국방부장관은 ‘광주사태의 전모’를 발표해야 했으며, 워커 주한미대사도 "광주사태는 한국내의 문제로 미국이 책임질 것이 없다"는 해명성 발언을 하게 되었다. 또, 이 사건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피력했던 김석휘(법무부장관), 이현재(서울대총장)는 경질되고, 허문도, 장세동 등의 강경파가 득세하여 학원안정법 파동이 야기되었다.

이후 6월 29일 새벽, 84년 학원자율화조치 이후 ‘대학총학장의 요청 없이는 경찰을 대학에 투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9개 대학에 경찰병력을 투입, 삼민투위 관련자 66명을 연행하였다. 또한 서울대 지하신문인 ‘깃발’에 주목하여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사건이 만들어졌고, 김근태, 이을호 등이 연행되어 이근안, 김수현 등에게 고문을 받게 되었다.

또, 미국 정부는 1989년 6월 19일 국회 광주특위의 질의서에 대해 25쪽 분량의 해명서를 보냈다. 해명서에는 "계엄사가 광주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하에 있지 않았다"면서, "광주에 투입되었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 하에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따라서 "미국은 특전사 부대가 광주에 배치된 것을 사전에 몰랐으며, 그들이 광주에서 취한 행동에 대한 책임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외에 83년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이 있었지만, 이것은 대한민국 학생운동에서 벌인 반미운동의 일환이라기보다는 북한의 남파공작원에 의한 폭파사건으로 밝혀졌다. 이후 부산의 다대포 간첩사건을 통해 이들이 저지른 소행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며 학생운동에서 반미의식은 대중적으로 크게 강화되었다. 더 이상 일제 강점기를 해방시켜준 국가, 6.25 전쟁에서 자유를 지켜준 국가, 자유 민주주의 이상국가로서의 미국이 아니었다. 이는 좌익 지하운동에서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한 인식과 비슷한 성장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즉, 해방 후 좌익 지하당 운동에서 명맥을 유지해왔던 반제국주의로서의 반미의식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며 생성된 학생운동의 반미의식이 서서히 ‘접합 점’을 찾아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접합 점’은 이후 삼민투의 서울미문화원 점거사건과 학생 운동권의 사상투쟁과 사구체 논쟁을 통해 등장한 자민투 이후의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노선)에 의해 만들어진 셈이다.

다시 말해, 해방 후 좌익계열과 북한의 ‘반미’와 5.18 이후 확산된 학생운동의 ‘반미’가 결합됨으로써, 학생운동이 ‘반미자주화운동=>반체제 통일운동=>친북, 종북 주사파 운동’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겪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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