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 정전협정 69주년] 이승만이 택한 '벼랑 끝 외교'는 뭐였나
유엔군 위임 군지휘권 환수 안해...협정 불참했지만 '당사자성' 확보
국제사회와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자기들 문제로 여기도록 만들어

1953년 7월 27일 북한·중국·미국 대표의 서명으로 체결된 정전협정문 영문본. 이승만 대통령은 서명을 거부해 훗날 미군철수를 겨냥한 ‘종전선언’ 가능성을 막았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위임함으로써 실질적 당사자의 위치를 잃지 않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기 위한 이승만 ‘벼량끝 외교술’의 일부였다. /연합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정 서명을 거부해 훗날 미군철수를 겨냥한 ‘종전선언’ 가능성을 막았고, 유엔군사령관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위임함으로써 실질적 당사자의 위치를 잃지 않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기 위한 이승만 ‘벼량끝 외교술’의 일부였다. /연합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공식 중단됐다. 올해로 ‘정전협정’ 69주년이다. 북의 남침으로 촉발된 전쟁에서 3년간 전투가 지속되는 가운데, 2년 이상 이어진 정전협상을 둘러싼 역사적 드라마, 지지부진하던 협상이 전쟁 배후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죽음으로 급물살을 탔다는 것 등등 잊거나 모르고 지내 온 대목이 많다.

북한에선 6월 25일~7월 27일을 ‘반제반미투쟁 월간’으로 보낸다. 6월 25일이 "리승만 괴뢰도당과 미제가 전쟁을 일으킨 날"이라면, 7월 27일은 "침략전쟁을 일으킨 미제국주의자들이 영웅적 조선인민 앞에 무릎 꿇은 날"이다. 김정은 집권 후엔 ‘전승절’로 격상됐다.

반면 우리는 언제부턴가 역사를 영화·드라마 등 대중 서사를 통해 배운다. 왜곡·거짓 내지 단편적 이해를 조장하는 경우가 많은 게 문제다. 영화 ‘강철비2’에서 대통령(정우성)이 영부인(염정아)을 향해 "휴전협정 서명에 남한이 빠져 있다"며 "학교 선생이면서 그것도 모르냐" 핀잔을 준다. 독립된 주권국가가 아님을 우회적으로 꼬집은 것이다. ‘대한민국=미제의 식민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거 중 하나이기도 한데, 극도의 ‘역사 무지’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정전협정문에 이승만 서명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정전협정이란 원래 전쟁 최고사령관들 사이에 체결된다. 김일성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이 아니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서명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 위임했으므로 마크 클라크 사령관이 대표로 서명한 셈이다.

정전협정 불참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목숨 건 ‘벼랑끝 외교’의 일부였다. ‘종전 성립’ 즉시 유엔군 사령부와 주한미군 명분이 사라진다. 이승만 정부는 정전협정에 불참함으로써 ‘자유대한 통일 의지’를 분명히 하며, 훗날 미군철수와 유엔사령부 해체를 획책할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했다.

지난 1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서거 57주기 추모식'에서 박민식 보훈처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연합
지난 19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서거 57주기 추모식'에서 박민식 보훈처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연합

70년전 미국은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문명사적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미 국무부를 비롯한 사회 주류에 좌파 지식인이 적지 않았다. 자유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명확히 인지한 인물은 이승만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3년 1월 한국전쟁 종식과 미군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미국정부와 이승만 대통령은 격렬히 대립한다. 1953년 6월 8일 체결된 포로송환협정을 깨고 열흘 후 새벽 2만7000명 반공포로를 석방해버린 것은 이승만의 결정적 한 수였다. 결국 이날 예정됐던 정전협정 조인식이 7월 27일로 연기된다.

1975년 기밀 해제된 문건에 따르면, 1953년 당시 아이젠하워 정부는 이승만 제거 후 남한을 다시 미 군정 하에 둘 것을 골자로 한 ‘에버데이 작전’을 고려했었다. 한국전쟁 종식 및 미군철수가 ‘한반도 적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미동맹 및 주한미군은 이승만의 ‘전략적 미국 들이받기’로 태어난 역사적 산물이다.

한미동맹 및 주한미군의 존재가 대한민국 생존과 번영의 기틀이 됐음을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보지 않는 한 논리적 정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승만 정부는 유엔군에 위임했던 군지휘권을 환수하지 않았다. 국제사회 및 미국이 한반도문제를 자기문제로 여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전시작전권 환수가 이뤄져도 협정 당사자로서 대한민국의 책임·권한은 지속된다.

북한·중공이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의 대표성을 확인한 후 정전협정 조인식에 임한 것은 이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정전협정문에 한국(군 )대표의 서명이 없으니 당사자가 아니라고 북한과 한국 학계 일각에서 주장되곤 하는데,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의 집요한 ‘종전선언’ 시도는 한층 황당한 노력이 된다.

이승만의 협정 불참은 절묘했다. 종전협정 주도의 법적 근거를 차단하면서 ‘당사자’성을 확보한 것이다. 16개 참전국 사령관 대표인 유엔군 사령관은 군지휘권을 위임받았으므로 한국군 사령관까지 대표한다.

정전협정에 따라 1954년 우리 대표가 제네바 회담에 참석했고 공산 진영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1차 세계대전 때도 독일군의 무조건항복을 주장하며 휴전협정 체결을 반대했던 미군 사령관 존 퍼싱 또한 조인에 불참했었다.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쉬가 대표 서명했지만, 미군의 협정 당사자성이 부정된 바 없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1919년 베르사이유 평화협상 참석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한편, 지난 토요일(23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선 ‘종전 평화문화제’가 열렸다. 정전협정 69주년을 겨냥한 이 자리에 2000 여 명이 모였다. "7.23 DMZ로 모이자! 휴전에서 평화로!", 국내 7대 종교와 370여 개 시민사회단체 및 70여 개 국제 파트너 단체들이 구성한 행사라고 한다.

"적대를 멈추자, 전쟁을 끝내자, 남북·북미 정상 합의 이행하라, 우리의 힘으로 평화를 만들자"는 슬로건엔 기본적으로 ‘주한미군 철수’가 담겨 있다. 이 행사의 성격과 여기서 언급된 평화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한 참석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76세)과 김일성(39세).
23일 임진각에서 개최된 ‘종전 평화문화제’ 무대. 한국전쟁 정전협정 69주년을 겨냥한 이 행사는 가수 이은미가 초대돼 ‘떼창’이 벌어진 흥겨운 자리이기도 했다. 다만 여기서 언급된 ‘평화’의 의미를 참석자들 대부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23일 임진각에서 개최된 ‘종전 평화문화제’ 무대. 한국전쟁 정전협정 69주년을 겨냥한 이 행사는 가수 이은미가 초대돼 ‘떼창’이 벌어진 흥겨운 자리이기도 했다. 다만 여기서 언급된 ‘평화’의 의미를 참석자들 대부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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