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國旗)가 상징하는 것, 비극의 섬 아일랜드 3
국기(國旗)가 상징하는 것, 비극의 섬 아일랜드 3
  • 하야시 신고(林信吾, 작가・저널리스트)
  • 승인 2019.0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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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In-depth 2019/6/21

林信吾의 「서방견문록」

【요약】

・‘아일랜드혁명・원정’, ‘가톨릭 처벌법’으로 아일랜드는 비극적인 역사를 경험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아일랜드 상황이 변화

・아일랜드독립운동은 인도의 독립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톱 사진)아일랜드의 풍경

아일랜드의 비극이란 종교대립으로 초래되었다는 것을 전고(前稿)에서 설명해 드렸다. 조금만 복습해 둔다면 국교회를 세워 로마교황청과 결별한 잉글랜드는 가톨릭의 스페인으로부터 군사적인 압력을 받았다. 때문에 ‘배후의 위협’이 될 수 있는 가톨릭나라 아일랜드를 무슨 일이 있어도 제압해야 했다.

이리하여 1586년 당시의 잉글랜드왕 헨리 8세는 아일랜드인 귀족・지주가 누구 한 사람도 지지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왕을 자칭하면서 그 땅을 사실상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독립을 요구하는 반란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잉들랜드의 아일랜드 지배가 일단 완성을 본 것은 약 100년 정도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라고 한다. 그 정도로 아일랜드인의 저항은 완강했던 것이다.

사진)헨리 8세
사진)헨리 8세

동시에 지배의 완성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수많은 참극의 결과라는 것을 의미 한다. 1641년 ‘아일랜드 혁명’으로 불린 대규모 반란으로 카톡릭 교도들은 한차례 아일랜드 지배권을 되찾기도 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 청교도혁명을 주도한 올리버 크롬웰이 악명 높은 ‘아일랜드원정’을 실시했다.

이 원정은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서 아녀자들까지가 희생된 학살사건이 수차례 일어났다. 희생자 수가 만 단위가 된다고 할 정도였다.

사진)올리버 크롬웰
사진)올리버 크롬웰

뒤에 이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역사문제’는 영국이 나치스 독일과의 전쟁=제2차 세계대전을 벌일 때 아일랜드가 영국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겠다는 커다란 화근을 남기기까지 했다.

게다가 잉글랜드는 악명 높은 ‘가톨릭처벌법’으로 가톨릭신자였던 지주의 토지는 몰수해서 프로테스탄트 입식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입식자라고 하더라도 다수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거처를 그냥 두고 있는 소위 부재지주였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카톨릭 농민들은 소작인이 되어 점점 가난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특히 1775년에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그 대응에 내몰려 연합왕국(1707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방하여 성립된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 연합왕국(이하 편의적으로 ‘런던 정부’로 부르겠음)은 아일랜드에 타협적인 태도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시기에 많은 프로테스탄트가 부재지주가 아니라 아일랜드로 직접 이주해서 사업을 일으키고 스스로를 ‘아일랜드의 지배계급’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고액납세자가 된 이 프로테스탄트 상공업자들은 아일랜드 의회에 큰 세력을 유지하면서 자치 확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789년에 프랑스시민혁명이 터졌다. 혁명의 파급을 두려워한 런던정부는 아일랜드의 가톨릭에 대하여 일단은 타협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를 ‘지배계급’이었던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 보면 원래 사람 수로는 다수파인 가톨릭 사이에서 ‘프랑스혁명정부와 제휴해서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쟁취’하겠다는 기운이 높아지면서 정치적으로는 고립된 입장으로 내몰렸던 것이다.

사진)프랑스혁명
사진)프랑스혁명

아일랜드의 지배계급이었던 프로테스탄트는 이런 국면에서 결국 자치 확대 요구에서 완전히 입장을 바꿔 런던정부와의 완전한 일체화를 희망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1800년 런던 정부 주도로 ‘연합법’이 가결되었다. 이를 받아들여 다음 해인 1801년 아일랜드는 정식으로 런던정부에 병합되었다. ‘그레이트 브리튼 및 아일랜드연합왕국’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아일랜드는 식민지에서 정식으로 영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 연합법을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런던정부는 회유책으로서 ‘가톨릭의 권리확대’를 주장했지만 당시의 국왕 조지 3세가 난색을 보인 사정도 있고 해서 공약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그래서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은 전혀 식지 않았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 아일랜드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1921년에 ‘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되었다. 현재의 내셔널리스트(아일랜드민족주의자)와 영국으로의 귀속을 요구하는 유니어니스트와의 대립과 IRA(아일랜드공화국군)에 의한 테러 문제는 거의 이 무렵에 싹이 텄다.

이 독립에서 아일랜드 신헌법공포(1937년)、그 후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에 대해서는 다음 호부터 순서대로 봐 나가기로 하고 본고의 마지막에 아일랜드국기를 주목하고 싶다. 왼쪽부터 녹(綠)、백(白)、오렌지의 삼색기다. 녹색은 풍부한 자연과 가톨릭을 상징한다. 그리고 오렌지는 프로테스탄트의 상징(오렌지공 윌리엄에 유래함)이다. 그리고 한가운데의 백(白)은 양자의 평화공존을 상징하고 있다.

사진)아일랜드 국기
사진)아일랜드 국기

“종교적 대립을 넘어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또 침해받지 않는 민주국가를 구축한다”고 하는 독립운동 이념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아일랜드 독립운동 때문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받은 것이 20년 정도 뒤에 독립을 쟁취하게 되는 인도의 독립파다. 인도국기도 또한 이슬람의 신성한 색인 녹(緑)색을 아래에 힌두교가 신성시하는 색인 사프론 색을 위에、그리고 양자의 평화공존을 상징하는 백(白)색이 한가운데에 배치되어 있다. 또 흰 바탕 한가운데에는 불교의 달마(法)를 상징하는 원형의 문양(文様)이 묘사되어 있다.

인도는 잘 알려져 있듯이 힌두교 신자가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는 인도와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파키스탄, 불교국 스리랑카, 거기에 원래 동파키스탄이었던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하여 지금도 종교적 대립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새삼스럽게 외국인인 내가 이런 것을 호소해도 소용없을지 모르지만 자국과 국기에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먼저 국기가 어떠한 이념을 상징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다시 배우고 싶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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