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최악의 시간 1920년대 후반

1924년 11월 하와이한인대표회
1925년 12월 동지식산회사 설립
1931년 4월 동지식산회사 폐업
1930년 7월 동지미포대회 개최
박용만의 죽음, 독립단 통합
김현구, 김원용, 최영기, 이용직
미포대회 직후 모두 이승만 배신

류석춘
류석춘

1925년부터 1932년까지 이승만은 인생 최대의 수난기를 보내고 있었다. 고려공산당 상해파가 장악한 임시정부가 1925년 3월 이승만을 탄핵하고, 그로부터 7년 후인 1932년 11월 김구의 한국독립당이 장악한 임시정부가 다시 이승만을 ‘국제연맹 총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명전권 수석대표’로 임명하기까지 이승만은 길고 긴 고난의 터널을 지났다. 나이로 치면 50부터 57까지다. 무엇이 그를 힘들게 만들었는가?

상해에서 자신을 비토하는 상황이 무르익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하와이의 주도권은 물론 미주 독립운동에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1924년 11월 ‘하와이한인대표회’를 개최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을 축출하는 수순으로 개최한 1922년 1월 레닌의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그리고 이를 이어받은 1923년 1월 상해의 ‘국민대표회의’에 대항하기 위한 비슷한 방식의 회합이었다.

이승만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두 권의 책.
이승만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두 권의 책.

이승만은 하와이 복귀 직후인 1921년 7월부터 가동하기 시작한 자신의 조직 ‘대한인동지회’를 본격적으로 활성화시켜, 통일전선 전략을 구사하며 자신을 공격하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했다. 미주 전체를 대상으로 24개 지역조직을 갖춘 대한인동지회는 물론이고 한인기독학원, 한인기독교회, 태평양잡지사, 대한부인구제회, 하와이대한인교민단 (교민총단) 등 이승만이 설립을 주도한 모든 단체들이 총동원됐다.

‘하와이한인대표회’에 참여한 단체 가운데 성격이 다른 단체는 딱 하나 ‘교민총단’뿐이었다. 교민총단은 "이승만이 상해에서 임시대통령으로 재임하던 1921년 3월 상해 임정의 내무부령 제4호 ‘임시교민단제’에 의하여 종래의 ‘하와이국민회’를 개명·개편한 것으로, 1925년부터 구미위원부 산하 단체로 위상을 바꾼" 단체다 (유영익, 2019,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 비전』 청미디어, p. 144). 다시 말해 이 단체는 원래 안창호 조직이었는데, 이승만이 접수한 단체였다.

‘하와이한인대표회’를 거치며 이승만은 대한인동지회 ‘총재’가 됐다. 즉 장악력을 높였다. 한편 ‘동지회’는 이 모임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와 달리 ‘비폭력주의’를 표방하면서 동포들의 ‘경제력향상’에 주력하는 활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1925년 12월 이승만은 동지식산회사 (同志殖産會士, The Dongji Investment Company: Limited) 를 설립했다. 1주에 100달러짜리 주식 300주를 모은 자본금 3만 달러로 시작한 주식회사다.

이 돈으로 이승만은 하와이 군도의 남쪽 끝에 있는 가장 큰 섬 (Big Island, 하와이 섬) 의 작은 도시 힐로 (Hilo) 의 배후지 땅을 구입하고 ‘동지촌’이라는 농장을 개척하기 위해 한인 노동자 약 30명을 유치했다. 농사를 짓고, 숯을 굽고, 목재를 가공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미군에 납품할 요량이었으나, 불량으로 모두 실패했다. 이에 더해 1929년 시작된 미국의 대공황은 이승만의 사업에 결정타를 날렸다. 부채를 양산한 동지식산회사는 마침내 1931년 4월 폐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민 1세대 노후자금을 투자한 사람들 돈이 모두 사라진 셈이었다. 투자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승만에 대한 믿음이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치명적이었다.

이 상황은 1930년 1월 개최된 하와이 교민총단 선거에서 이승만이 지지하는 후보의 낙선으로 이어졌다. 1915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승만이 공을 들여 접수한 안창호 조직은 결국 다시 안창호에게 돌아갔다. 타협을 모르는 이승만은 이 패배를 돌파하는 방법으로 교민사회의 분열을 해소해야 한다며 자신의 적극적 반대파와 통합을 모색했다.

이승만에게 가장 적대적이던 박용만 계열의 ‘대조선독립단’이 가장 먼저 동의했다. 이 단체의 지도자 박용만이 중국에서 의열단 김원봉의 부하 이해명에게 1928년 10월 17일 피살되었기 때문이다 (이원순, 1989, 『세기를 넘어서』 신태양사, pp. 176-8). 존폐위기에 놓인 독립단이 이승만에게 호의를 보이자, 교민총단도 통합에 동의했다. 마침내 1930년 7월 ‘동지회 미주 하와이 대표회’ (동지미포대회 同志美布大會) 를 개최해서 통합을 선포하는 일정이 만들어졌다.

당시 상황을 오정환 (2022: 248-9) 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승만은 신이 났다. 행사 준비를 위해 미국 본토에서 동지회 간부들을 여럿 불러왔다. 그의 최측근이었던 ‘김현구’는 이미 몇 달 전 하와이에 와 있었다. 김현구는 워싱턴 구미위원부에서 수년간 일하며 이승만의 신임을 얻은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그에게 하와이 교민총단 서기 겸 국민보 주필, 동지회 지방회장, 태평양잡지 편집인 등 여러 중책을 맡겼다. 김현구는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정신을 함양하자’고 연설할 정도로 충성을 다짐했다. 이승만은 동지회 시카고지부 대표 ‘김원용’, LA 지부 대표 ‘최영기’도 불러왔다. 그리고 새로 부임한 한인기독교회 목사 ‘이용직’까지 네 사람에게 미포대회 진행을 맡겼다." 미포대회는 성황을 이루며 대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성공과 동시에 위기가 들이닥쳤다. 미포대회를 진행하며 이승만을 돕던 네 사람이 거의 동시에 모두 이승만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이용직은 독립교회인 한인기독교회를 이승만의 뜻에 반해 하와이 성공회 감독교회로 넘기며 건물을 신축하고자 했다. 교민총단의 손덕인 단장 또한 청년회 활동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의 동지회와 갈등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승만은 국민보에 자신을 돕는 글을 써달라고 측근인 김현구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김현구가 실은 글은 이승만의 ‘독재’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본토에서 이승만을 돕기 위해 넘어 온 김원용과 최영기마저 김현구 편을 들며 이승만은 순식간에 사면초가로 몰렸다.

김성률의 동지식산회사 주식 (1928, Richard Kim 소장), 출처: 미주 한인을 위한 사이트 홈피 (https://mehansa.com/p280/32784)

이승만 열혈지지자인 동지회의 이원순, 김노디, 정태하 등이 나섰다. 이들은 1931년 1월 교민총단에 진입해 건물을 점령하고 김현구를 파면했다. 선거를 새로 해서 교민총단의 지도부를 교체했다. 밀려난 교민총단 구 지도부는 동지회를 상대로 법정 싸움을 시작했다. 한인기독교회 내분도 결국 법정으로 갔다. 1931년 내내 지속된 두 건의 법정투쟁에서 하와이 법원은 모두 동지회 패배를 확정했다.

동지회원 숫자가 줄어들면서 하와이는 ‘이승만의 동지회’와 ‘안창호의 국민회’로 다시 양분되었다. 하와이를 통일한 지도자 이승만의 신화는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은 결국 동지식산회사가 실패하면서 비롯된 일이었다. 물론,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상해의 공산주의자들이 이승만을 몰아내는 과정에서부터 비롯된 일이기도 했다. 실망한 이승만은 1931년 11월 21일 하와이를 떠나 미 본토로 갔다. 상해 임시정부와 관계를 복원하고 1933년 1월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 전권대사로 파견되어 모스크바까지 여행하면서도 이승만은 하와이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배신한 4인방 가운데 두 사람은 두고두고 이승만을 괴롭히는 글을 남겼다. 김현구는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Autobiography with Commentaries on Syngman Rhee, Pak Yong-Man, and Chong Sun-man" 라는 제목이 붙은 영어 글을 남겼다. 김현구가 남긴 육필 원고를 서대숙 교수가 편집해서 1987년 하와이대학이 출판했다. 이름이 각기 ‘만’으로 끝나는 세 인물 즉 ‘이승만, 박용만, 정순만’에 관한 코멘트를 단 자서전 성격의 글이라, 국내에서는 ‘3만전’이라고도 불린다.

김원용이 남긴 글은 『재미한인50년사』라는 책이다. 1959년 김원용이 필사본으로 출판한 책을 2004년 손보기가 편집해서 혜안출판사가 펴냈다. 두 책 모두 1930년 전후 이승만의 측근에서 적으로 돌변한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는 책이다. 그만큼 이승만에게는 불리한 책들이다. 이승만을 헐뜯는 오늘날의 문헌은 모두 이 두 책을 원조로 삼고 있다. ‘뒤끝작렬’인 책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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