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화(墨畵)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1921~1984)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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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 시인은 항상 빵모자를 쓰고 다녔다. 빵모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애주가였고 파이프담배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종삼에게 죽음이란, 드비시와 바흐, 모차르트를 더 이상 듣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고전음악 마니아였다.

그의 시는 정직하고 간결하다. 행간의 여백은 독자를 사념(思念)으로 끌어들여 감동의 여운을 남긴다. 그의 시편들이 그려낸 세계는 잔잔한 호수에 비친 물상(物像)처럼 고즈넉하다. 부드러운 바람에 주름살 물결이 물상과 함께 퍼져나간다. 김종삼은 대상을 묘사하되 주관성을 배제하고 필요한 부분만 그린다. 묘사를 할 뿐이지만 시편들에 이야기와 사연이 담긴다. 여기 소개된 시 ‘묵화(墨畵)’도 그러하다. 사연은 단순하다. 적막강산 산촌에 할머니와 소가 살고 있다. 할머니는 함께 집으로 돌아온 소에게 물을 먹이고 있다. 소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목덜미에 멍에를 얹고 쟁기를 끌었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아팠을 소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시인은 그 순간을 묵화 한 점으로 남긴다. 할머니의 시선이 소의 발잔등으로 옮아간다. 자신처럼 소 또한 발잔등이 부었을 것이라 여긴다. 이렇게 산촌의 오두막 한 채가 적막 속에 저물어간다.

시 ‘묵화(墨畵)’는 마치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박수근은 별다른 기교 없이 소와 나무, 아낙네와 아이 등,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그린다. 똑같은 대상일지라도 박수근이 그리면 한국인의 정서가 진하게 담긴다. 두 예술가는 얼굴모습과 체구까지 서로 닮았다. 살아생전에 교류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 같다. 두 예술가의 작품은, 비록 장르는 다르지만,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미(美)란 지극히 선(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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