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미술관서 황창배 유작전 '접변'(接變) 개최...9월 25일까지

김종영미술관에서 지난달 22일부터 추상화가 황창배의 유고전 ‘접변’이 열리고 있다. /김종영미술관
 
황창배 ;무제‘ 65x82㎝, 한지에 아크릴릭, 1991. /김종영미술관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서 故 황창배(1947∼2001)의 유작전 ‘접변’(接變)이 열리고 있다(9월25일까지 김종영미술관).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1915∼1982, 서울대 조소과 교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김종영미술관은 매년 원로작가 초대전을 개최해왔다. 전공을 뛰어넘어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던 김 교수는 동양화과 졸업생 황창배의 부탁으로 결혼식 주례를 맡아 보기 드문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 사진 한장으로 환기된 인연이 올해 전시로 이어진 것이다.

조각가 김종영은 당시 한국미술이 당면한 최대 현안을, "우리의 지역적인 특수성에서 인류 보편성을 찾아내는 것"으로 봤다. 그 연장에서 동·서양의 상호보완을 강조한다. 황창배 역시 "밀가루로 빵만 만드는 게 아니라 수제비·국수도 해 먹을 수 있다"며, 한국적 이미지를 찾고 드러내는 작업에 동양화가 서양화가 모두 동참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서로 다른 장르의 두 미술가에겐 ‘다름’을 수용하며 자기를 보완한다는 공통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전시 제목도 ‘접하여 변하다’ 즉 ‘접변’이다.

전시엔 서예·전각·수묵채색화·유화 등 총 32점이 나왔다. 1점(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을 제외한 31점이 황창배미술관으로부터 대여된 작품들이다. 1978년 31살의 황 화백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한국화 최초로 대통령상을 수상, 미술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화면에 색을 쓰기 시작하면서 ‘한국화의 이단아’로 불렸다. 화선지 대신 캔버스에 아크릴과 유채 물감으로도 작업을 했다. 서양화 재료를 사용했음에도 한국화의 특성을 구현하고 있다. 한국화처럼 화면에 제발(題跋·작품에 관한 글)을 써넣었으며 면보다 선의 특성을 살린 붓질이었다. 서명 시 연도를 단기(檀紀)로 표기하곤 했다.

1980년대 후반 개인전을 열면 작품이 모두 팔릴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다양한 실험적 작업을 해온 황 화백은 당대 사회문제에도 무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땐 물고기 배 속에 오염물질이 들어 있는 그림을 그렸다. 44살 때 안정적인 교수직(이화여대)을 그만두고 충북 괴산에 작업실을 차려 창작에 몰두한다. 1997년 북한 문화유산 조사단에 참가해 국내 화가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다. 1999부터 동덕여대 초빙 교수를 역임하던 중 2001년 담도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54세, 너무 이른 나이였다. 부인 이재온 씨 등 유가족이 그를 기리는 황창배미술관(서대문구 연희동)을 운영중이다.

"황창배는 당시 일군의 한국화 화가들이 서구 추상표현주의 영향으로 현대화를 모색할 때 정반대의 길을 갔다. 격을 갖췄기 때문에 파격할 수 있었다." 김종영미술관 박춘호 학예실장의 설명이다. 김종영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황창배를 단순히 ‘한국화의 이단아’가 아니라 ‘한국화의 현재화’를 주체적으로 시도한 선각자로 새롭게 조망하고자 한다. 황 화백의 삶과 작품 세계는 한국미술의 근본을 찾고 뿌리를 가지려는 후배작가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황창배 ‘무제’ 123x153㎝, 화선지에 먹과 분채, 1986. /김종영미술관
생전의 황창배 화백. /김종영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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