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1945년 對南部 창설 남로당의 박헌영도 속였다
김일성,1945년 對南部 창설 남로당의 박헌영도 속였다
  • 유진
  • 승인 2017.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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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평양의 군중대회에 처음으로 등장한 김일성. 그가 당을 장악한 뒤 처음으로 한 일은 대남 공작을 지휘하기 위한 비밀부서인 '연락부' 창설이었다.
1945년 평양의 군중대회에 처음으로 등장한 김일성. 그가 당을 장악한 뒤 처음으로 한 일은 대남 공작을 지휘하기 위한 비밀부서인 '연락부' 창설이었다.
 
[유 진/북한의 대남공작 70년사 ②] 해방정국과 대남조직의 창설

우리민족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때로부터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많은 피를 흘리며 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의 해방은 우리민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 측이 승리하면서 비로소 찾아왔다.

조선의 해방이 우리민족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고 강대국이 가져다준 결과물이었기에 해방 이후 한반도와 우리민족의 운명도 우리가 아닌 그들이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합군 측인 미국과 소련의 합의로 한반도는 8.15 해방과 함께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분단 이후 소련이 점령한 38선 이북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미군이 진주했던 38선 이남에는 이승만을 위시로 한 자유민주주의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김일성은 조선이 해방된 날로부터 1개월 남짓 시간이 지난 1945년 9월 19일 소련 해군함정 ‘푸카초프’호를 타고 그 명성과는 다르게 조용히 원산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그래서인지 귀국 당시 김일성은 소련군 육군대위 계급장이 달린 장교복장을 입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릴 적 본명인 ‘김성주’나 그 후에 사용했던 ‘김일성’이라는 이름 대신 ‘김영환’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당시 김일성이 사용했던 ‘김영환’이라는 가명은 후에 북조선공산당 평안남도위원회 재정부장 박정호를 직접 대남공작에 투입할 때 사용하게 된다.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소련주둔군의 비호와 빨치산 동료들의 지원을 받으며 곧바로 권력 장악 활동을 개시했다. 그 첫 번째 조치가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조직하고 그해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책임비서의 권좌를 차지한 것이다.

김일성이 만들었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엄연히 말하면 박헌영이 1945년 8월 20일 서울에서 여운형ㆍ허헌ㆍ김원봉ㆍ한빈ㆍ이주하 등과 재건한 조선공산당의 북조선지역 5개 도를 관장하는 지역조직이었다.

김일성은 원래 38선 이북지역에 별도의 공산당조직을 만들고 싶었으나 이미 박헌영 등이 조선공산당을 재건했기 때문에 국제공산당의 1국 1당제 원칙에 따라 할 수 없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라는 명칭과 조직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는 박헌영이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서울의 박헌영이나 조선공산당 중앙조직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활동했다. 따라서 그 명칭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라는 명칭보다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했다.

이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을 남북조선을 모두 포괄하는 중앙조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김일성의 반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또 조선공산당을 38선 이남지역만의 조직으로 한정시키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김일성의 북조선공산당은 그 명칭대로 38선 이북지역을 대표하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그 명칭과는 상관없이 38선 이남지역만을 관장하는 지역조직으로 축소된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때 이미 김일성은 남쪽의 조선공산당을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투쟁하는 집단이 아니라 해체하거나 흡수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공산당 조직과 함께 행정조직 장악에도 주력하였다. 김일성은 1945년 10월 28일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여 발족되었던 ‘북조선 5도 행정국’을 1946년 2월 8일 발전적으로 해체하면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창설하고 그 위원장을 차지해 명실공히 행정수반 자리에 앉았다.

중요한 것은 광복 이후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이 38선 이북지역만이 아닌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면서 그 안에 대남공작 기구를 설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훈련 중인 북한의 정찰총국 산하 부대원들(맨 위)과 서울서 조직한 조선공산당(남로당) 총수인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의 북조선분국을 맡아서 출발한 김일성(중간). 아래 사진은 해외 테러 요원 양성소인 35호실 여군들.
훈련 중인 북한의 정찰총국 산하 부대원들(맨 위)과 서울서 조직한 조선공산당(남로당) 총수인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의 북조선분국을 맡아서 출발한 김일성(중간). 아래 사진은 해외 테러 요원 양성소인 35호실 여군들.

 

김일성은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창설하면서 북조선분국 내에 서울의 박헌영과 그가 재건한 조선공산당 중앙조직 활동을 감시하면서 각종 대남관련 업무를 담당할 별도 부서를 설치했다.

그것은 바로 소련파 이동화ㆍ허가이 등이 연이어 책임자로 활동했던 조직부 내에 설치했던 ‘연락부’라는 조직이다. 그러니까 당시에 북조선분국 조직부 내에 별도로 설치한 연락부는 김일성을 비롯한 북조선분국 내부의 일부 간부들만 알고 있었고 서울에 있던 박헌영이나 조선공산당 조직에서는 모르는 비밀이었던 셈이다.

이를 통해 김일성이 북조선분국 내에 대남공작부서를 만든 초기부터 공작기관의 임무를 단순히 서울에 있던 조선공산당 조직과의 연락임무에만 국한하지 않고 여러 가지 목적의 대남공작을 다양한 방식으로 벌이려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김일성은 1946년 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실행과정에서 평양의 북조선공산당과 서울의 조선공산당 조직 사이의 협조와 연락 등 업무가 늘어나자 이를 담당할 별도의 조직으로 ‘5호실’을 설치하고 임해를 초대 실장에 임명했다.

‘연락실’로도 불렸던 5호실은 북조선공산당 조직부 내에 설치했던 기존의 연락부 업무 가운데 조선공산당과 및 박헌영과의 연락 업무를 따로 분리시켜 만든 별도의 조직으로 김일성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조직부 내에 설치했던 연락부가 북조선분국 일부 간부들만 알고 있는 비밀조직이었던 것과 달리 5호실(연락실)은 남쪽의 박헌영이나 조선공산당 간부들도 알고 있는 공개적인 조직이었다.

이후 김일성은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을 조직하고 6개월 뒤인 1947년 2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부 산하에 대남공작 전담기구인 ‘연락부’를 정식 창설하였다. 그리고 초기 연락부장에는 소련공작원 출신 김창수를 임명하였으며 1948년 6월 이효제로 교체하였다.

1949년 6월 남북의 노동당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으로 된 이후에는 과거 조직부 소속이었던 연락부를 별개의 독립 부서로 승격시킨 다음 일본에서 입북한 김천해를 연락부장에 임명했다. 김천해는 3개월 만인 1949년 9월 이주상으로 교체되었다.

북조선노동당 조직부 산하의 연락부 조직도 남로당과(서울지도부과), 공작위원과(특수조직과), 연락과, 정보과, 공급과 등 기존의 5개 과에 유격지도과, 교양훈련지도과, 통일전선과, 통신과 등 4개 과를 더 만들어 9개 과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리고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남로당과, 공작위원과, 통일전선과, 연락과, 정보과를 1부문으로 하고 유격지도과, 교양훈련과, 통신과, 공급과를 2부문으로 구성하였다.

한편 북한은 노동당뿐만 아니라 내무성 등에도 대남공작 전담 조직을 만들고 각 기관의 특성에 맞게 정보수집 등 다양한 공작을 전개했다.

 

y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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