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마크 그리니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그레이 맨>이 7월 13일 개봉되었다. CIA 암살 요원 코트 젠트리가 우연히 CIA의 부패한 비밀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블록버스터 액션물이다. 부패의 연결고리인 CIA 부서장 카마이클, 카마이클의 지시로 젠트리를 쫓는 전직 CIA 요원 로이드 핸슨, 거대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신과 지인을 지켜야 하는 젠트리의 긴장관계가 광대한 스케일과 현란한 특수효과에 묻혀버렸다. 넷플릭스 영화 사상 역대 최고인 2억 달러의 제작비가 들었다는데, 백첩 반상에 선뜻 젓가락 가는 곳이 없다.

젠트리의 본래 이름인 ‘코트 젠트리’는 엄마가 죽은 후 별로 불린 적이 없었다. CIA 입사 초기에는 ‘바이올레이터’(Violater)라는 코드 네임으로 살았다. 911 이후 특수 작전팀이 편성되면서 ‘시에라 6’(Sierra Six)라는 호출 부호가 코드 네임을 대신했다. 그러다 국가권력에 쫓기면서 ‘그레이 맨’ (Gray Man)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자신의 진짜 신분과 자질을 숨긴 채 탐색자의 눈에 띄지 않고 군중 속에 섞일 수 있는 남자. 젠트리는 그렇게 그레이 맨이 되었다.

평일 점심시간 붐비는 식당에 CIA 교육생이 들어간다. 교육생은 주인과 웨이터의 눈에 띄지 않고 5분 동안 앉아 있어야 한다. 웨이터가 물 한잔이라도 갖다 주면 불합격이다. 교육생은 그 시간, 그 식당에 가장 어울리는 평범한 외모와 행동으로 주인과 웨이터의 주목을 받지 않아야 한다. CIA의 그레이 맨 교육이다. 그레이 맨 관점에서 보면 ‘제임스 본드 007’은 튀어도 너무 튄다. 턱시도에 클래식한 정장, 시계는 롤렉스와 오메가, 샴페인은 돔페리뇽 아니면 볼랭저, 이름은 절대 숨기는 법이 없고 항상 여자를 달고 다닌다. 현실세계와 영화의 차이다.

그레이 맨을 쫓는 핸슨은 하버드를 졸업한 인재다. 그러나 규정이나 프로토콜을 존중하지 않는 소시오패스적 성향 때문에 입사 5개월 만에 CIA에서 쫓겨난다. 민간정보회사를 차려 하버드 동기생인 카마이클의 정보 파트너로 활동하지만, 정부기관이 공식적으로 하기 힘든 고문이나 불법 사찰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실제로 911 이후 미국에서 민간정보회사가 많이 생겨났다. 업무 영역도 정보수집, 디지털 포렌식, 빅데이터, 신원조사, 위기관리, 인질협상, 경호는 물론 군사 분야로 확대되었다. 법적 시비가 예상되는 조사 분야에서도 민간분야의 아웃소싱이 행해졌다. CIA는 911 이후 테러 용의자들에게 수면박탈, 감각박탈과 같은 강화된 조사기법을 허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법은 미국 내에서, 국가기관이 사용하기에는 논란이 예상됐다. CIA는 탈법적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유럽·아프리카·중동·아시아의 여러 우방국에 ‘CIA 비밀감옥’이라고 불리는 블랙 사이트(Black Site)를 운영했다. 2004년 이라크 아부그라이드 수용소에서 미군이 이라크 포로를 학대한 사건이 드러났다. CIA가 포로 신문에 CACI, Titan 같은 민간정보회사 직원을 조사요원과 통역으로 채용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핸슨에게 그레이 맨을 쫓도록 지시한 카마이클, 입사 8년 만에 초고속 승진으로 부서장 자리에 올랐다. 윗사람에게는 맹목적 충성을, 아래 사람에게는 냉혈한으로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레이 맨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행된 숱한 불법과 탈법에도 불구하고 면책을 받았다.

코트 젠트리·로이드 핸슨·카마이클…세상 어느 정보기관에나 있을 법한 인간 군상들이다. 젠트리는 다시 그레이 맨으로 세상을 등졌다. 핸슨은 소용이 다하자 토사구팽 당했다. 결국 카마이클만 남았다. 세상은 남아있는 자 카마이클만 기억한다. 부조리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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