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7일 서울 뱅커스클럽에서 열린 금융권 협회장들과의 간담회에서 금산분리 등 과거의 규제를 과감하게 개선해 금융산업의 혁신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연합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7일 서울 뱅커스클럽에서 열린 금융권 협회장들과의 간담회에서 금산분리 등 과거의 규제를 과감하게 개선해 금융산업의 혁신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연합

산업 간 경계가 사라진 빅블러 시대를 맞아 윤석열 정부가 금산분리(金産分離)의 ‘빗장’ 풀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블러(blur)는 희미해진다는 뜻을 가진 단어다. 그 앞에 크다는 의미의 빅(big)을 붙여 빅블러로 쓰는데, 이는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산업 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지난 1995년 도입된 금산분리법은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각각의 지분을 보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하나의 법률이 아닌 공정거래법, 은행법, 금융지주회사법 등 세분화된 규제가 적용된다.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일반기업으로 이루어진 지주회사는 금융업이나 보험업을 영위하는 회사의 주식을 취득할 수 없다. 은행법은 산업자본이 은행 주식의 4%를 초과 보유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기업이 은행을 지배할 경우 고객의 자산을 빼돌려 자회사를 지원하거나 계열사를 늘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역(逆)으로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소유하는 것도 어렵다. 금융지주회사법이 금융지주회사의 비금융회사 주식 보유나 지배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지주회사는 금융회사를 지배하는 지주회사다.

현재 은행과 보험사는 비금융회사의 지분을 15% 초과해서 보유할 수 없다. 카드사 등 다른 금융회사는 20% 이상 보유할 수 없다. 출자할 수 있는 업종도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2009년 금융규제 완화정책을 펼치며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 한도를 9%까지 올렸지만 박근혜 정부는 다시 금융규제를 강화하며 금산분리로 복귀했다. 이어 규제 혁신을 선언한 윤석열 정부는 금산분리를 재검토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산업 간 경계가 흐릿해지는 상황에서 ‘낡은 규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금융당국은 지난달 19일 금융규제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켜 금산분리와 관련한 전방위적 규제 개선 논의에 착수했다.

금융당국은 무엇보다 비금융업 진출 범위를 확대해달라는 은행권의 건의를 받아들여 업무 범위 확대와 업종 제한없이 자기자본의 1% 이내에서 투자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카카오 등 빅테크는 인터넷전문은행특례법으로 금융업 진출이 자유로운 반면 은행은 금융지주회사법과 은행법에 따라 비금융회사의 지분 투자가 어렵기 때문이다.

금산분리 규제가 완화되면 자기자본이 20조원인 은행은 2000억원까지 비금융회사에 투자할 수 있다. 특히 부동산시장은 치열한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규제가 풀리면 은행들은 전국의 지점과 온라인 앱을 활용해 감정평가, 투자·개발, 임대수익 등을 얻을 수 있다. 직접 거래를 중개해 수수료 역시 기대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관련 업무도 가능해진다. 현재 미국, 스위스, 스페인 등 해외에서는 은행이 암호화폐의 발행·수탁·송금사업을 하고 있다. 은행들은 국내에서도 암호화폐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보험사는 상조서비스, 카드사는 신용평가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금산분리 규제 완화로 대기업, 특히 재벌에 의한 금융지배를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과거에도 중간금융지주회사 도입 등을 통해 산업자본의 금융업 진출에 대한 규제 완화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무산됐다.

중간금융지주회사란 일반지주회사가 금융회사를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금융 부문의 규모가 클 경우 일반지주회사 아래 중간금융지주회사를 설립, 금융회사를 보유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012년 중간금융지주회사 체제를 허용하는 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삼성특혜법’이란 논란이 불거지면서 19~20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산업자본의 은행업 진출 문턱이 낮아져도 은행 지분을 공격적으로 늘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대기업들은 사내유보금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 만큼 굳이 은행 지분을 가질 유인이 적다는 것이다.

대신 빅테크의 은행업 진출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특히 빅테크의 은행업 진출이 용이해지면 외국은행과의 경쟁력 또한 제고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최근 카카오와 토스 등 빅테크가 속속 금융업에 진출하는 추세를 고려하면 금산분리 규제가 완화될 경우 아직 금융 라이선스를 받지 않은 네이버의 은행업 진출이 이루어질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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