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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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에 해당하거나, 학문 분야에서 통상적으로 용인되는 범위를 심각하게 벗어날 정도의 연구부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

김건희 여사의 2008년 박사학위 논문에 대한 국민대의 발표다. 여론은 들끓는다. 졸업생들은 재조사위 명단을 공개하라 하고, 현직 교수들은 학교를 대신해 성명서를 발표했다.

"재조사 결과에 깊은 자괴감을 느끼며 국민대 학생과 동문들에게 한없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한 단체는 "해당 논문을 표절 프로그램으로 확인한 결과 표절률이 43%가 나왔다"며 김여사의 박사학위를 즉각 박탈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 내 주변 보수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김 여사가 박사학위를 이용해 일하는 것도 아닌데, 왜 표절이 아니라고 해서 일을 더 키우느냐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의견에 동의한다. 해당 논문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논문 제목에 들어간 ‘회원 유지’를 ‘member Yuji’라 쓴 맨 첫 페이지만 봐도 이건 좀 심했다 싶다. 이런 것도 걸러내지 못한 지도교수·심사위원이라면, 본문을 꼼꼼히 읽어보며 제대로 된 검증을 했을 리가 만무하니 말이다.

그런데 국민대는 왜 이 논문을 표절이 아니라 발표했을까? 여기에 따르는 후폭풍을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권력에 굴복한 것일까. 답을 말하기 전에 김 여사처럼 표절 시비를 겪었던 다른 정치인들의 논문을 들여다보자.

먼저 민주당 대표가 유력시되는 이재명 의원. 그는 2006년 가천대에서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방안에 관한 연구’라는, 자기 삶을 부정하는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이 논문은 미디어워치 산하 연구진실성검증센터로부터 ‘50-80%가 표절로 의심된다’는 판정을 받는다.

그 뒤 이재명은 한 강연회에서 중앙대를 나오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한 자신이 이름도 잘 모르는 대학의 석사학위가 필요하겠느냐고 말해 물의를 빚었으며, "학위 필요 없으니 제발 취소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가천대는 이 논문이 "표절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덕분에 이재명은 아직 석사다.

다음으로 추미애를 보자. 그녀는 2004년 연세대 경제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해당 논문에는 다른 사람의 논문을 인용하고도 출처를 쓰지 않은 게 문제됐다. 이는 당연히 표절에 해당되지만, 추미애는 그 당시 ‘학계 논문 작성 기준이 정비되기 전’이라고 해명했다. 총리를 지냈던 정세균의 2004년 경희대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표절이 발견됐다. 그는 "연구윤리 기준이 강화되기 전의 일"이라며 "제게 표절이라고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위에서 보듯 과거엔 표절에 대한 기준이 느슨했다. 결과와 고찰에 새로운 통찰이 담겨 있다면, 남의 논문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들은 문제 삼지 않았다는 얘기다. 2007년 표절에 대한 강화된 윤리기준이 발표됐지만,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표절을 확인하려면 전문성과 더불어 긴 시간과 노력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논문 표절을 체크해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이젠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빠른 시간 내 다른 이의 논문을 검증하는 게 가능해졌다. 장관을 비롯한 고위공직자 검증에서 논문표절이 단골이슈가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알게 됐다. 논문을 써본 사람 중 표절에서 자유로운 이가 드물다는 것을. 국민대를 비롯해 우리 대학들이 표절을 인정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것도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표절을 이유로 해당 논문을 취소한다면, 이후 표절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논문을 취소해야 하잖은가? 예컨대 김 여사 논문의 재조사를 요구하는 이들이 표절 의혹을 받는다면, 얼마나 난감할까?

정치과잉의 시대, 정치는 사회 각 부문에 영향을 미친다.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조국 자녀의 입시비리로 인해 고교생들이 대충 스펙을 쌓던 관행이 사라지는 걸 보라. 학위논문도 마찬가지다. 논문검증이 정적을 공격하는 주 무기가 되다 보니, 교수들도 이제 학위를 대충 주는 게 불가능해졌다. 심사 대상자가 장차 높은 자리에 오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김건희 씨 논문의 유일한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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