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 과연 중국의 일부인가 (중) 근현대사와 주역 3인

장제스, 중화민국 1~5대 총통...중공도 '항일전쟁 공적' 인정
장징궈, 장제스 아들로 국민당 6~7대 주석·정부 수반 올라
리덩후이, 제7대 총통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 핵심적 역할

1949년 국부천대(國府遷臺: 국민당 정부의 대만 이전) 이후의 중화민국 총통 3인. 왼쪽부터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장징궈(蔣經國 1910~1988), 이덩후이(李登輝 1923~2020). /중국 바이두
1949년 국부천대(國府遷臺: 국민당 정부의 대만 이전) 이후의 중화민국 총통 3인. 왼쪽부터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장징궈(蔣經國 1910~1988), 이덩후이(李登輝 1923~2020). /중국 바이두

1895년 일본식민지로 출발한 대만의 근대사는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현대사로 나아간다. ‘중화민국으로서의 대만’은 장제스(蔣介石 1887~1975)와 함께 밀려온 국민당 정부 및 세력으로 시작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주도의 근현대사 해석이 주류로 자라잡으면서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돼 왔으나, 활발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평가란 결국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평가이기도 하듯, 대만의 역대 총통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 역시 역사관·세계관의 문제이자 가치관의 문제다.

수천년 봉건왕조 끝에 등장한 신생 공화국의 여러 절박한 사정을 감안할 때, 장제스의 삶과 이력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지나치게 가혹하고 정치적이었다는 시각이 우세해졌다. 중국 교과서에 "서구 열강의 주구(走狗)" "비적(匪敵)"으로 묘사되던 장제스 평가가 개혁·개방 후 크게 달라진다. 중국공산당의 여유이자 대만을 끌어않으려는 시도의 일환이기도 하다. 1980년대 들어 장제스 생가를 단장하고 문화혁명 때 파헤쳐진 모친의 무덤이 복원됐다.

지난 십수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화·드마라에서도 대중적 호감도 높은 국민배우급 연기자가 장제스 역을 맡는 등, 전처럼 악마적 ‘매국노’ ‘독재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특히 2011년 중국 사회과학원이 펴낸 36권짜리 <중화민국사(1911~49)>가 상징적이다. 이 저작의 필자들은 장제스의 ‘항일’을 ‘정의를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갔다(義無反顧)’고 표현한다. 2013년 사회과학원 원로 연구원 두 명이 쓴 <장제스 전기> 역시 발간 당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장제스 연구 40년’의 중국 학자들이 장제스 일기와 비밀해제된 문서를 토대로 북벌·항일전쟁 공적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민족해방론 중심의 우리나라 근현대사 해석이 얼마나 편향된 것인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장제스는 중화민국 제1~5대 총통(1925년~1975년)이다. 본명은 장중정(中正), 그의 모어 발음에 가까운 Chiiang Kaishek으로 통하기도 한다. 17세때 신학문을 접했으며 크리스천(감리교)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도 관계 깊은 황푸(黃 土+甫)군관학교 교장을 비롯해 중요한 군인·정치인 이력을 쌓았다.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후원한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장제스의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유학도 특기할 만하다. 일본육사 유학 시절 중국동맹회에 가입, 1911년 신해혁명에 투신한 이래 국부 쑨원(孫文 1866~1925)의 신임을 받았다.

장제스는 1927년 4월 쿠데타를 통해 공산당을 축출하고 중화민국의 숙원사업이던 1928년 지방에 할거한 군벌들을 완전히 정리한다(北伐). 정부와 군 지배권을 확립한 그가 우선 한 일은 ‘공산당 토벌’이었다. 공화국 건설을 위한 산업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공산당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및 소련 성립 직후라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인들의 동경이 강했기에 대단히 힘겨웠다. 게다가 일본의 침략이 결정적으로 중화민국을 곤경에 몰아 넣었다.

1936년 12월 제2차 국공합작으로 항일전쟁에 돌입한다. 애국적 군벌 출신 장쉐량(張學良 1898~2001)이 장제스를 시안(西安)에 불러 감금하고 강요한 게 결정적 계기였다. 마오쩌둥의 홍군(紅軍)이 국민당군의 포위를 뚫고 370일 걸려 1만2500km를 걸어서 옌안(延安)으로 탈출한, 이른바 대장정(大長征) 직후였다. 10분의 1로 줄어 빈사상태였던 홍군은 2차 국공합작으로 기사회생한다. 마오가 훗날 자신의 승리에 대해 "일본 덕분"이라고 말한 배경이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1941년 연합군의 대일 선전포고까지 장제스는 4년간 일본을 홀로 대적했다. 김구 등 항일 독립세력을 후원한 것도,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문제를 거론해 결의를 이끌어 낸 것도 장제스였다. 다만, 근대국가 체제가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신생 공화국에게 부정·부패은 피하기 어려운 고민이었다. 밀수 관련 뇌물을 받은 조카며느리를 사형에 처할 정도였으나 한계가 있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로 정도는 아니지만, 1955년 중화민국·미국 방위협정 체결도 중요하다. 20년간 대만 경제발전의 기틀이 됐다.

1970년대 중화민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 회원국 자격마저 상실한다.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면서다. 장제스가 비감함 속에 89세로 죽자, 잔여 임기를 승계한 정부를 거쳐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1906~88)가 국민당 6·7대 주석 및 중화민국 정부 수반에 올랐다. 그리고 1988년 장징궈 병사 후 부통령으로서 직무를 승계한 이가 제7대 총통 리덩후이(李登輝 1923~2020)다.

리덩후이는 대만에 뿌리를 둔 본성인(本省人) 출신 첫 중화민국 총통이다. 한때 사회주의에 심취한 바 있으나 근대문명을 이해하며 거기서 벗어났다. 1943년 교토제국대학(농업경제과)에 입학, 전후 대만제국대학의 후신인 국립대만대를 졸업했다. 1968년 미국 코넬대학교 농경제학 박사가 된 이래 해당 분야 전문가로 일했다. 일본군 소위로 참전했던 이력이 특히 눈길을 끈다. "자원입대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혀 논란을 부르기도 했으나, 일제시대 대만인들의 지위 향상, 또 근대적 엘리트 집단이던 일본군대에서 많이 배웠다는 인식에 근거한 발언이었다.

소수의 외성인이었던 국민당 세력, 상대적으로 소외된 다수의 본성인들 사이에 갈등의 뿌리가 깊다. 리덩후이는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1990년 기존의 간선제로 8대 총통에 오른 리덩후이가 개헌 및 직선제 도입 후 처음 치러진 1996년 선거에서 9대 총통으로 당선됐다. ‘대만의 미스터 민주주의’란 별명이 주어졌을 만큼, 그의 등장은 대만 정치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국민당 내 기득권 파벌과 대결해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 시장·대통령 직선제를 차례차례 밀어붙혔다. 비로소 국민당 외의 정당이 허용됐으며, ‘반란세력(공산당) 토벌을 위한 국가동원 시기’가 공식 종료된다.

"권위주의 체제의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원활하게 국정 관리를 수행한 인물"이라는 게 리 전 총통에 대한 일반적 평가다. 1989년 톈안먼 사태 땐 긴급성명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비인간적 행위는 반드시 역사의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입장을 낸 리덩후이지만, 양안(중국·대만)관계의 초석을 놓은 것 역시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특사를 통한 비밀 협상 끝에 중국 본토와 1992년 ‘하나의 중국 원칙’에 입각해 양안관계 발전을 추구한다는 ‘92합의’를 공식화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포탄이 오가던 대만해협이었으나, 점진적인 ‘3통’(通商·統航·通郵) ‘4류’(경제·문화·과학기술·스포츠 교류) 확대를 통해 양안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992년 한중수교 당시 리덩후이 총통이 비밀특사를 청와대에 보내 중화민국과의 외교관계를 1년만 연장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대만에 닥칠 외교적 풍파를 최소화하려 애쓴 것이다. 국민당이 배출한 총통이면서 ‘양국론’(兩國論: 본토와 대만은 별개의 나라)을 들고 나와 파문을 부른 바 있으며, 2000년 대선 때 사실상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후보를 지지했다. 퇴임 후 대만인의 독자적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 결국 국민당에서 축출되기에 이른다. 리덩후이는 독립주의자들에게 ‘대만의 아버지’로 불린다. 독립 성향의 대학교수였던 현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을 정계로 이끈 것도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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