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15는 71회 독립기념일로 기념해야” (上)
“올해 8.15는 71회 독립기념일로 기념해야” (上)
  •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 승인 201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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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 8. 15.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정부 수립 경축식 ⓒ NARA

대한민국은 또 한 차례 8.15라고 하는 국정기념일을 맞이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이 8.15가 무엇을 기념하는 날이냐 하는 문제에 관하여 국민적 합의가 없다. 정부는 금년에도 공식적으로는 이날을 ‘광복절(光復節)’로 기념할 모양이다. 1945년 8월 15일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제74회 광복절’로 기념할 작정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왜냐 하면, 8월15일을 ‘제74회 광복절’로 기념하려면 대한민국이 지금부터 74년 전인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이룩’했어야 하는 데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광복’이라는 국어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챙겨 보면 자명해 진다. 모든 국어사전은 ‘광복’의 의미를 “잃었던 국토(國土)와 국권(國權)을 회복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독립’을 이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독립’을 이룩했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이 날 ‘국토’와 ‘국권’ 가운데 어느 것도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1945년 이 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인 제국 일본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한 날일 뿐이다.

◇해방이 독립은 아니었다.


1949. 8. 15. 서울. 이승만 대통령이 중앙청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1주년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낭독하고 있다.
ⓒ맥아더기념관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한반도는 일본에 의한 35년간의 강점(强占) 상태로부터 ‘해방(解放)’되었다. 그러나 ‘해방’이 곧 ‘독립’은 아니었다.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제2차 세계대전의 4대 연합국들은 1943년 11월의 카이로 정상회담에서 ‘세계대전 전후 처리 방안’의 일환으로 한국 문제에 관하여 “적절한 시점에 독립시킨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테헤란, 얄타, 포츠담 등지에서의 후속 ‘정상회담’에서 그 같은 ‘원칙’을 거듭 재확인했지만 “어떻게 독립시키느냐”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합의도 이룩하지 못한 채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시점에서 한반도의 법적 지위는 일본의 강점 상태에서 ‘해방’은 되었지만 곧바로 ‘독립’을 이룩하지 못한 채 북위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하여 남북으로 분할 진주한 미∙소 양국군에 의한 ‘군사적 점령’ 상태가 계속되었다.

따라서, 1945년8월15일의 시점에서 대한민국은 ‘해방’은 되었지만 ‘광복’은 이룩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독립’ 문제는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 회의(미국∙영국∙소련)에서 이루어진 합의를 이행하는 문제를 놓고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서 서울에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차원에서의 해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한국의 독립 문제는 1947년 9월 유엔총회 안건으로 상정되었고 1947년 11월14일 유엔총회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라는 제목의 총회 결의 제112호가 가결됨으로써 해결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 1945년 9월 2일 미국의 미주리호 갑판에서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항복 조인식에 대표로 나온 일본 외상 시게미쓰는 지팡이를 짚은 다리를 심하게 절룩거렸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일왕 탄생일인 천장절에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기념식에 당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 신분으로 참석했다가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다리가 날아간 인물이다.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 1945년 9월 2일 미국의 미주리호 갑판에서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항복 조인식에 대표로 나온 일본 외상 시게미쓰는 지팡이를 짚은 다리를 심하게 절룩거렸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일왕 탄생일인 천장절에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기념식에 당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 신분으로 참석했다가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다리가 날아간 인물이다.

유엔은 “유엔 감시 하에 인구 비례에 입각한 자유 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이라는 ‘독립’ 방안을 ‘처방(處方)’한 것이다. 그러나, 난관은 이로써 해결되지 않았다.

북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소련과 소련의 앞잡이들인 공산주의자들이 유엔 총회 결의의 수용을 거부하고 유엔이 파견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지역 입경(入境)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유엔은 1948년 2월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열린 ‘소총회’에서 “우선 유엔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하라”는 결의를 채택했고 이에 의거하여 한반도의 38도선 이남 지역에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으로 절반의 광복 성취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制憲國會)’ 개회식에서 이승만 의장(첫 의장으로 선출)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식사를 낭독하고 있다.

이 총선거를 통하여 구성된 ‘제헌국회(制憲國會)’가 7월17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 공포했고 이 헌법에 의거하여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한반도의 38선 이남 지역에서는 ‘독립국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로써, 한반도 남쪽 절반의 땅에서는 ‘절반의 광복’이 이루어졌다. 이 지역에서는 ‘국토’와 ‘국권’의 회복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전체 한반도 차원에서의 ‘광복’은 여전히 미결의 과제로 남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지역의 평양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의 별개의 ‘정부’ 수립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서는 남쪽의 대한민국 정부와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사이에 어느 쪽에 ‘정통성’이 있느냐를 가려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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