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근
박석근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세균이 인류의 운명을 바꾼다는 것을 통찰한다. 일찍이 세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경고했다. 핵보다 더 무서운 게 바이러스라고. 지금 인류는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고 했다. 인간은 심우주를 탐사하고 외계 생명체를 찾아 나섰지만, 바이러스를 정복하지 못한다.

한재림 감독 영화 ‘비상선언’의 모티브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아니었을까. 코로나19보다 치명적인, 한 번 감염되면 며칠 내 사망에 이르는 바이러스가 만약에 유행한다면, 하는 가정이 창작의 계기였을 터이다. ‘비상선언’은 한재림 감독이 여태까지 해왔던 작업과 결이 좀 다르다. 그는 ‘연애의 목적’ ‘우아한 세계’ ‘관상’ ‘더킹’ 등의 작품을 연출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세계는 다양하여 재난영화 연출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한국영화사 최초의 비행재난영화로, 재난영화 계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송강호·이병헌·전도연·김남길 등 출연진도 화려하다. 형사 역의 송강호는 과거 캐릭터 그대로지만, 이병헌은 달랐다. 조폭 같은 선 굵은 연기가 아닌 어딘가 약점이 엿보이는 전직 기장역을 맡았는데, 연기에 물이 한껏 오른 이병헌을 보는 것 또한 관전 포인트다.

‘비상선언’을 했지만 착륙공항을 찾지 못하는 여객기의 아비규환. 승객들은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모두 감염되었다. 착륙지 하와이는 여객기 착륙을 불허하고, 비상회항의 착륙지 일본공항도 착륙을 불허한다.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한 것은 무동력 착륙의 위험 때문만은 아니다. 또다시 반미 반일의 감성팔이 영화가 아닌가 하는 조바심은, 다행히 무사히 착륙한 여객기처럼 가라앉았다. 한재림 감독은 싸구려 감성팔이 대신 영화감독의 양심을 지켰다. 시나리오는 다수와 소수의 문제,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의 안전을 지키는 것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런 공리주의는 과거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로 하여금 살인을 하도록 부추겼던 사상이었다.

작품의 주제는 스토리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그 무엇이다. 기장의 ‘비상선언’에도 불구하고 착륙을 불허한다는 것은 ‘너 죽고 나 살자’의 극단적 이기심이 아니라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대변한 것이다. 영화는, 그건 악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듯하다. ‘비상선언’을 비롯한 모든 재난영화의, 영웅의 희생과 휴머니티의 승리는 통쾌하면서 한편 허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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