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미카
와타나베 미카

일본은 빈틈없는 약속사회다. 비즈니스는 물론 일상생활의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장소를 정확히 약속한다. 결혼식 초대장도 일찍 보내고 초대받은 사람은 반드시 확답을 보내야 한다. 파티나 강연회 등 모임도 마찬가지다. 지킬 수 있을지 모르는 무리한 약속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약속문화가 형성된 배경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에도시대(江戶時代) 약 3백 년 동안 계속된 봉건사회에서 자신이 속하는 사회의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었다. 개인의 의견을 주장하거나 기본 질서를 어지럽히면 칼로 다스리는 시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숨을 죽이고 살아왔다.

일본 가부키(歌舞伎)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츄신구라’(忠臣藏)다. ‘의리(義理)와 인정(人情)의 갈등’이 그 테마다. 에도시대의 문학작품은 대부분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의리란 인간이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도리, 즉 사회적 약속을 의미한다. 등장인물들은 의리와 인정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은 의리를 선택한다. ‘츄신구라’ 클라이맥스는 47명의 무사(武士)가 동시에 할복하는 장면. 관객들은 그것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개인을 희생하면서 전체의 뜻을 따르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인들은 무의식적으로 개인보다 자신이 속하는 공동체를 앞세운다. 공적인 일을 사적인 일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경제발전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 흔히 가장 존경받은 직업은 학자나 교육자라고 들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성공한 사업가나 경영자가 더 존경을 받는다. 왜냐하면 학자는 탁상으로 이상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사업가는 몸으로 실천하고 결과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마쯔시타 코노스케(松下幸之助)나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와 같은 사업가는 살아있는 철학을 가지고 국가와 사회 앞에 세운 약속을 철저히 지켜 성공했다. 그래서 지금도 존경 받는다.

일본 사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약속이 도쿄의 지하철만큼이나 얽혀 있다. 사람들은 그 무언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늘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쌓이는 게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러한 사회적 약속이 일본의 경제발전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 된 것 같다. 그 구성원들은 비록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아간다 할지라도, 약속된 사회에서 이탈하지 않고 잘 어울려 사회적인 질서를 지켜 왔기에, 오늘날 일본이 이처럼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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