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피아니스트 성호와 가족의 11년 기록 ‘녹턴’
‘얼굴없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다큐멘터리 ‘뱅크시’

[Artist, Documentary] 

수백억 원을 들인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치열한 개봉 경쟁을 하고 있는 사이, 찾아보지 않으면 결코 존재를 알 수 없는 다큐멘터리 2편이 개봉한다. ‘녹턴’과 ‘뱅크시’. 하나는 한국, 또 하나는 영국 작품이다. 두 영화는 아티스트, 그것도 일반적인 상식 울타리에 있지 않은 아티스트를 기록한 다큐라는 공통점이 있다.

성호와 동생 건기.
성호와 동생 건기.

■ 자폐, 환상 아닌 현실을 담다

변호사 우영우가 있다. 천재적 두뇌와 자폐 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서번트 증후군의 변호사 우영우는 남과는 다른 시선으로 사건들을 풀어 나간다.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이다. 전국민적인 화제를 얻고 있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비현실적이라는 논란도 있다.

'녹턴' 포스터.
'녹턴' 포스터.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은성호가 있다. 성호는 웹툰에서 튀어나오거나 소설로 쓰여진 인물이 아니다. 실재하는 사람이다. 성호는 엄마가 없으면 혼자서 면도도 하지 못한다. 그가 잘하는 건 오직 하나, 음악이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친 성호는 국내 최초 발달장애인 클라리넷 중주단 드림위드앙상블의 수석단원이다.

작은 몸집의 엄마 손민서는 성호를 위해 모든 시간을 쓴다. 그를 데리고 복잡한 지하철을 타면 천방지축 사방으로 들쑤시는 그의 행동을 드잡느라 기운이 다 빠진다. 좌석에 성호를 앉히곤 행여 옆사람에게 피해가 갈세라 그 옆에 비집고 앉아 성호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체념한 듯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다. 주변의 시선에 신경쓸 힘도 없다.

간당간당한 그 평화를 불현듯 깨는 건 또다른 아들이다. 성호 동생 건기. "인생 다 바쳤지, 엄마 인생 더블로 쓴 거예요, 형 인생은 어차피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형에게만 온신경을 다 쓰는 엄마가 싫다. 오랜만에 집에 온 건기. 엄마는 동생이 형에게 다정하길 원한다. "냅두라고, 쟤랑 대화하고 싶지 않으니까." "네가 형한테 대화 한번 시도해봤어?" "대화가 돼야 하지, 말 안 통하는 사람한텐 말 안 걸어." "못 통하는 거랑 안 통하는 것도 몰라? 너는 스스로 기회를 찾지만 쟤는 줘야 해." "딴데 가서 찾으라고 기회를." "형제는 너밖에 없는데 어떻게 딴데 가서 찾아!" 이쯤이면 전쟁이다.

건기는 하지만 독백으로 속마음을 드러낸다, 나는 형을 미워한 적 없어요, 엄마를 미워한 적은 있지만… 잘못된 거지. 차츰차츰 성호와 엄마의 인생에 박자를 맞추기 시작하는 건기, 이들 가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은 성호가 직접 치는 쇼팽의 ‘녹턴’이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성호와 엄마는 필자에게 이미 구면이다. 2017년 SBS스페셜 ‘서번트 성호를 부탁해’에서 본 적이 있다. 당시 TV화면에서도 성호는 지하철 안이다. 3호선에서 "종로3가다"를 외치며 내리려 하고 엄마는 더 가야 한다고 말린다. 결국 경복궁 역에 내린 성호와 엄마. 성호는 정확하게 1998년 5월 18일 월요일에 학교 현장학습 때문에 경복궁 역에 왔었다고 말한다. 엄마는 호기심 많고 궁금증 많아서 혼자 다니게 하면 전국을 다닐지 모른다며 가늘게 웃는다. 성호는 2005년 22세 때도 방송에 등장했다. 당시 피아노를 배우던 성호에게 선생은 "타고난 절대음감"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한된 미래’일 수밖에 없다.

이 가족의 11년을 담은 것이 ‘녹턴’(Nocturne), 방송 다큐를 찍어온 정관조 감독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다. 2020년 제 42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8월 18일 조용히 개봉한다.

☞야상곡 '녹턴', 쇼핑 곡 가장 유명

엄마는 성호에게 말한다, 엄마 죽으면 들려줘, 쇼팽의 녹턴 C#단조. 다큐멘터리의 제목인 ‘녹턴’은 야상곡을 뜻한다. 조용한 밤의 분위기를 나타낸 서정적인 피아노곡으로 쇼팽 곡이 가장 유명하다. 다큐멘터리에서 성호가 직접 치는 녹턴을 들으며 소박하고 담담하고 평화롭다. 엄마가 말하는 녹턴20번 C#단조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노’(2002)에서도 깊은 여운을 남겼다. 하늘이 콕 집어 한국에 내린 피아니스트, 쇼팽 콩쿠르에서 1등을 한 조성진의 피아노로 들어보기를 권한다.

얼굴을 가린 채 담벼락 그래피티를 하는 뱅크시.
얼굴을 가린 채 담벼락 그래피티를 하는 뱅크시.

■ '불협화음' 파격적 예술 조명

2018년 10월 영국 소더비 경매장. 빨간 풍선을 든 소녀 그림이 104만 파운드(약 15억 원)에 낙찰됐다. 낙찰 직후, 액자 속에 숨겨졌던 소형 분쇄기가 가동되면서 그림의 절반이 가늘게 잘려 나갔다. 모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사고가 아니라 그림의 원작자가 고의로 한 퍼포먼스였다. 낙찰 받은 사람은 미술사에 남을 일이라며 기뻐했다.

'뱅크시' 포스터.
'뱅크시' 포스터.

퍼포먼스를 한 사람은 영국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다. ‘얼굴 없는 아티스트’로 알려진 그의 신원은 공개된 바가 거의 없다. 신비주의와 그래피티. 자신을 감추는 것과 어디든 적나라하게 휘갈겨대는 ‘낙서’와의 불협화음. 뱅크시는 이 두 가지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도발적인 예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 뱅크시가 다큐멘터리 ‘뱅크시’에 등장한다. 다큐멘터리에서도 그의 얼굴은 볼 수 없다. 그림 그리는 모습 등이 여러 번 나오지만 모두 모자이크 처리가 됐다. 완전 유명해지기 전인 2003년 영국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에 의하면, 뱅크시는 1974년생 백인 남성이며 14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그래피티를 시작했다.

십대 뱅크시가 스프레이를 들고 거리로 나선 1990년대 영국 사회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도시 곳곳에 시위와 투쟁이 이어졌다. 브리스톨의 담벼락에 그도 반항의 메시지를 남기기 시작했다. 그는 건물 벽·지하도·담벼락·물탱크 등에 그래피티를 남겼고 젊은 세대들은 열광했다. 2002년 런던 쇼디치 근교에 벽화로 그려진 ‘풍선과 소녀’ ‘꽃을 던지는 사람’ 등은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렸다. 다큐멘터리에는 팔레스타인의 콘크리트 장벽 그래피티, 베들레헴 ‘월드 오프 호텔’ 프로젝트 과정 등도 담겨 있다.

이제 뱅크시는 반달리즘 성격을 지닌 게릴라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아티스트가 후원자나 미술관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상업적으로 증명했다. 기존 질서를 뒤엎는 파격, 하지만 그 스스로 새로운 질서가 되어 돈방석 위에 앉았다. 소더비 경매에 나온 ‘풍선과 소녀’는 원래 25파운드(약 39만 원)에 팔던 그림이었다. 반쯤 분쇄되어 ‘사랑은 쓰레기통에 있다’라는 새 이름이 붙여진 뒤 2021년 다시 경매에 나와 18배 오른 1870만 파운드에 낙찰됐다. 글의 서두에서 낙찰자가 매우 기뻐한 것은 미술사적 의미만은 아니었다.

뱅크시는 다큐멘터리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Exit Through the Gift Shop)로 2010년 선댄스영화제를 통해 감독 데뷔도 했다. 이 영화는 2011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 후보에 올랐다. 다큐멘터리 ‘뱅크시’는 8월 11일 개봉했다.

☞코로나 의료진 응원 그림 그려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에 빠져들기 시작한 2020년 5월 뱅크시는 인상적인 작업을 했다. 영국 사우샘프턴 종합병원 응급실 벽에 ‘게임 체인저’라는 1m²크기 작품을 남겼다. 소년이 슈퍼히어로 인형 대신 마스크 쓰고 망토 휘날리는 간호사 인형을 가지고 노는 흑백 그림. 의료진을 응원하는 뜻이 담긴 이 작품은 가을까지 병원에 전시되다 국민건강보험(NHS) 기금 모금을 위해 경매됐다. 2021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1440만 파운드(약 224억 원)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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