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외국인도 대기업집단 총수로 지정할 수 있도록 공정거래법 시행령을 개정할 계획이었지만 부처 간 이견으로 재검토를 진행하기로 했다. /연합
정부가 외국인도 대기업집단 총수로 지정할 수 있도록 공정거래법 시행령을 개정할 계획이었지만 부처 간 이견으로 재검토를 진행하기로 했다. /연합

우리나라 민법상 친족(親族)의 범위는 배우자, 혈족, 그리고 인척을 말한다. 혈족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와 형제자매의 관계를 포함해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인척이란 혼인에 의해 관련된 사람을 의미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대기업집단을 지정하면서 계열사 현황은 물론 친족 등 특수관계인의 계열사 주식 보유 현황을 파악해 제출할 의무를 총수(總帥)에게 부과한다. 대기업집단의 총수는 곧 그룹 회장을 의미한다.

특수관계인 현황에 누락이 있는 경우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집단 총수를 검찰에 고발할 수 있고, 검찰이 기소할 경우 해당 총수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대기업집단 총수의 친족은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에도 해당된다.

하지만 이 같은 대기업집단 총수의 특수관계인 자료제출 의무는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무엇보다 특수관계인의 범위가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 등으로 넓어 파악 자체가 힘들다. 자칫 ‘얼굴도 모르는’ 친족으로 인해 대기업집단 총수가 고발을 당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글로벌 추세와도 맞지 않는다. 영미권 국가에서는 경제적 공동체로서 의미가 있는 가족 중심으로 특수관계인의 범위를 제한한다. 실제 미국에서는 특수관계인의 범위에 직계존비속과 형제자매, 배우자만 포함된다. 직계존비속은 부모·조부모 등의 직계존속과 자녀·손자녀 등의 직계비속을 말한다. 배우자의 부모나 형제자매는 포함되지 않는다.

영국은 특수관계인의 범위를 경제적 생활을 함께 하는 최소 범위인 배우자와 자녀로 한정하고 있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숙부와 숙모, 이종사촌과 고종사촌, 조카 등은 명시적으로 특수관계인의 범위에서 제외했다. 우리나라가 특수관계인 관련 법령을 만들 때 참고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도 한국보다 특수관계인 범위가 좁다. 특히 금융상품거래법에서는 특수관계인 범위를 배우자와 1촌 이내 친족으로 설정하고 있다.

14일 관계 부처와 재계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는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기업집단 규제 개혁을 연내 마무리 짓고, 내년부터 시행에 돌입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세부적인 내용을 담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즉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을 이르면 이달 20일 입법 예고할 계획이다.

앞서 새 정부가 발표한 국정과제에는 대기업집단 총수의 친족 범위를 대폭 축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혈족의 경우 기존 6촌에서 4촌, 인척은 4촌에서 3촌으로 범위를 좁히는 것이다. 이렇게 친족의 범위를 좁히면 대기업집단 총수 친족은 현재 8938명에서 4515명으로 절반가량 줄어든다. 지난 1986년 공정거래법 도입 이후 36년 만에 규제가 대폭 완화되는 것이다.

다만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집단 총수의 친족 범위에 ‘자녀가 있는 사실혼 배우자’를 포함하기로 했다. 사실혼 배우자가 계열사 주요 주주로 총수의 지배력을 보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규정이 시행되면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우오현 SM그룹 회장의 사실혼 배우자는 총수의 친족으로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최 회장의 사실혼 배우자와 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T&C재단은 ‘동일인(총수) 관련자’로 돼 있지만 현행법상 친족은 아니다. 하지만 공정거래법 시행령이 개정되면 내년 대기업집단 지정 때 총수의 친족으로 분류될 공산이 크다. SK그룹 계열사들이 총수 일가의 지분이 20% 이상인 회사에 일감 몰아주기를 할 경우 제재를 받는다.

SM그룹의 2대 주주 격인 우 회장의 사실혼 배우자도 내년 대기업집단 지정 때 총수의 친족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우 회장의 사실혼 배우자는 SM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삼라와 우방산업 지분을 각각 12.31% 갖고 있다. 또 삼라마이다스의 자회사인 동아건설산업 지분도 5.68% 보유하고 있다.

외국인 총수 지정 문제는 논란의 불씨로 남아 있을 전망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한국계 외국인이 지배하는 대기업집단의 등장과 외국 국적을 지닌 2~3세 총수의 증가를 감안할 때 외국인 총수 지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는 외국인을 총수로 지정할 경우 통상 마찰을 빚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 국적의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은 내년에도 총수 지정을 피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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