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陸 여사 48주기에 그녀와 쑹메이링을 회고한다

대한민국 제5~9대 영부인 육영수(왼쪽 1925~1974)와, 48년간 중화민국 영부인이었던 쑹메이링(1898~2003). 냉전시대 한복판의 반공국가였다는 공통점, 일제시대 신식교육받은 육영수, 20세기초 최고의 미국식 교육을 받은 쑹메이링의 차이점이 공존한다. 각각의 나라와 시대, 특별한 역할을 감당한 여성들이다.

신냉전 구도가 선명해진 가운데, 냉전시대를 돌이켜 볼 필요성이 더하고 있다. 15, 육영수(陸英修 1925~1974) 여사 48주기를 맞아 냉전의 최전선이던 대한민국과 중화민국(현 대만)의 영부인이었던 쑹메이링(宋美齡 1898~2003)을 나란히 회고해 본다.

20세기 동북아 역사를 특별하게살다 간 두 퍼스트레이디의 특별함은 한국과 중국(중화민국) 근현대사의 특수성에서 유래한다.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르다. 전근대적 환경 속에서 일제시대 신식교육을 받은 육영수, 부유하고 개명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미국식 교육을 받은 쑹메이링의 차이이기도 하다.

쑹메이링은 1927년 장제스(蔣介石 1887~1975)와 결혼한 이래 남편이 죽기까지 48년간 중화민국의 영부인이었다. 194311월말 미···소 정상이 모인 카이로 회담에선 장제스의 통역으로 참석했으나 그 이상의 역할을 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남편의 비서이자 정치고문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공로로 1966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이 수여된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중일전쟁·국공내전·국부천대(國府遷臺: 대만 천도),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화해 무드 속에 중화민국의 국제적 지위가 급변하는 등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겪었다.

박정희 평가가 극단적 굴곡을 거쳐 온 데 비해 육영수 평가엔 별 이견이 없다. 소외계층, 사회의 그를진 부분을 열심히 챙기려 했던 자세와 실천 때문일 것이다. 한 해 수천 통의의 민원 서신을 챙기며 직접 회신한 것이 대표적이다. ‘청와대 내 야당을 자임했던 것은 특히 주목된다. 민심의 흐름을 대통령에게 전하려 애썼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때때로 두 분 억양이 높아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정부를, 어머니는 국민을 대변하는 듯했다"고 밝혔다. 육영수 자신에겐 고통스런 일이었다. "하루 종일 피로에 지친 그분을 따뜻이 위로하는 대신, 언론에 기재된 신랄한 비판 글을 읽게 하고, 마음 아픈 여론을 얘기해야만 하는 나 자신이 때론 회의스럽다"고 글을 통해 토로한 바 있다(1964).

육영수는 충북 옥천의 대지주 육종관과 본처 이경령의 1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에 손꼽을 만한 사람으로, 조선말기 유학자·개화사상가 겸 소설가였던 작은할아버지 육용정, 기독교를 통해 독립운동에 관여한 사촌오빠 육정수 등이 있다. 육영수는 아버지에게 3명의 소실이 있어, 1210녀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랐다. 1938년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서울의 배화고등여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21세 때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에서 13개월간 교사로 재직했다. 1950년 육군 소령 박정희를 소개로 만나 그해 12월 결혼한다. ‘연애결혼이었다. 박정희가 전처 소생까지 있는 처지임을 안 부친이 반대하자 가출까지 감행한다.

박정희의 여성편력 전반을 옹호하기 어렵지만 이혼경력은 강요된 구습의 결혼과 신문물의 충돌이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드라마 3공화국’(1993)1936년 결혼한 박정희 김호남(1920~90)숨겨진 장녀’(박재옥 1937~2020)가 부모의 결혼을 두고 "집안 강요에 의한 결혼"이었다는 것, 수기 나의 아버지 박정희 어머니 김호남’(월간조선)에선 "아버지는 늘 내게 미안해 하셨다", "어머니(육영수)와 친하게 지내도록 여러모로 애쓰셨다"고 증언한다.

부모 이혼 후 친척집을 전전하던 재옥을 적극 거둔 것은 육영수였다. 20세기 전반 동북아에서의 연애사나 이혼력은 문화사적 의미가 있다. 조혼 등 구습에 기반해 10대 중후반 결혼당한남성들과 훗날 신여성들과의 인연은 불가피했다. 축첩이 위법·부도덕이 된 근대국가(중화민국, 일제하 조선, 대한민국)에선 원칙상 이혼’ ‘재혼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1963년 이래 청와대 안주인 육영수의 주된 관심은 민원 처리였다. "하루 수십통의 민원에 일일이 처리지침을 남겼으며, 특히 억울한 민원의 경우엔 비서들이 늘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도록 했다"고 한다. 이런 자세는 자연히 남편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적극 의견을 개진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보좌진이 함께한 자리에서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내 옆에 지독한 야당 총재께서 앉아 계시니 알아서 조심들 합시다.”

영부인 육영수는 영어공부를 했고, 전문가를 청와대로 청해 정치외교사·국사 강의를 들으며 세상 안목을 넓혀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어머니의 권유로 일찍부터 중국어를 배우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70년대 국제정세 변화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그 모든 것 이전에 육영수는 현모양처의 전형이었다. 핵가족이 국가의 기본단위, 국민교육의 기본이 가정교육이던 시대였고, 현모양처는 시대가 요구하던 여성상의 최대치였다.

반면 쑹메이링은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란 별칭을 얻을 만큼 타고난 정치인이었고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신해혁명의 후원자, 감리회 목사이자 기업인 쑹자수(宋嘉樹 Charlie Soong)33녀 중 3녀로 태어났다. 상하이 외국인학교를 다니다 1908년 두 언니(아이링·칭링)와 도미할 때 10살이었다. 이들 세 자매 얘기는 다분히 드라마틱해 만인의 관심을 끈다. 관련서가 <아이링, 칭링, 메이링-20세기 중국의 심장에 있었던 세 자매>로 번역돼 있다(까치출판 20219).

쑹메이링은 웨슬리언 칼리지에 입학, 힐러리 클린턴의 모교로도 유명한 웰즐리 칼리지에 편입해 우수한 성적으로 1917년 학사 학위를 취득한다(전공·부전공이 영문학·철학). 19274월 장제스가 국민당 내 공산당원을 숙청한 후 12월 쑹메이링과 결혼했다. 중화민국이 본격적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세기적 정략결혼이었고, 최대 피해자는 결혼하자마자 얼떨결에 이혼당한 두번째 부인 천제루(陳潔如 1906~1971)였다.

쑹메이링이 역사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36년 시안(西安)사건이다. 장쉐량(張學良 1898~2001)이 항일을 위한 국공합작을 요구하며 장제스를 억류하자, 그녀는 헬기를 타고 날아가 담판해 상황을 돌파했다. 당대의 모던 보이로 이름 높던 동북 군벌 장쉐량과의 교분도 크게 작용했다.

항일전쟁 중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협력을 이끌어 내고자 수차례 미국을 방문했고 매번 큰 주목을 받았다. 두 번 ‘TIME’지 표지를 장식했는데, "올해의 남성과 그 아내"로 장제스와 함께, "()같은 여성" 제하의 주인공 때였다. 1943218일 미 의회 연설은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첫번째 중국 국적자로 기록된다.

1975년 장제스 사후 미국으로 떠난 쑹메이링은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사라진다. 1988년 장징궈 총통 사망 당시 일시 귀국 후 미국으로 돌아가 20031023일 자택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106세였다. 대만에 묻힌 장제스와 함께 중국 본토에 묻히기를 꿈꾸며 완전한 안식처를 얻지 못한 상태다. 자서전·회고록을 일체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

1917년 쑹메이링 대학 졸업사진. 영문학(전공) 철학(부전공)을 공부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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