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미국 경매서 '일영원구' 매입…"디지털·아날로그 더해져 독특"
고종 재위기 국왕 호위 맡았던 무관 제작 추정…내일부터 대중에 공개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휴대 가능한 소형 해시계인 '일영원구'가 언론에 공개되고 있다. /연합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휴대 가능한 소형 해시계인 '일영원구'가 언론에 공개되고 있다. /연합 

해의 움직임을 보면서 시간을 측정하던 해시계는 오래전부터 쓰였다. 솥이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앙부일구'(仰釜日晷)도 그중 하나다.

둥근 공 모양으로 어느 지역에서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한 조선 후기의 독특한 해시계가 국내로 돌아왔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형태의 해시계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조선 후기 무관으로 알려진 상직현(尙稷鉉)의 이름이 새겨진 소형 해시계 '일영원구'(日影圓球)를 미국 경매에서 낙찰받아 국내로 들여왔다고 18일 밝혔다.

이번에 들어온 '일영원구'는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바 없는 희귀한 유물로 평가된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해시계인 '앙부일구'가 반구(半球) 형태인 데 비해 '일영원구'는 둥근 공 모양이다. 두 개의 반구가 맞물려 있는데 위쪽은 고정돼 있고, 아래쪽은 좌우로 움직인다.

구의 지름이 11.2cm, 전체 높이가 23.8cm로, 언뜻 보기엔 작은 지구본과 비슷하다.

전문가가 검토한 내용에 따르면 '일영원구'를 사용할 때는 먼저 추를 달아 늘어뜨린 '다림줄'로 수평을 맞춘 뒤, 나침반으로 방위를 측정해 북쪽을 향하게 하고 위도를 조정한다.

길쭉하게 생긴 'T' 자형 횡량(橫粱)과 태양이 일직선이 되는 순간 그림자가 횡량 아래에 파인 틈으로 들어가는데 이를 통해 시간과 각(刻·15분)을 확인하는 식이다.

이용삼 충북대 명예교수는 이날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설명회에서 "어느 지역에서든 회전축이 지구 자전축과 일치하도록 조정하면 남반구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십이지 시간을 표시하는) 시패(時牌)는 디지털 방식,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는 건 아날로그 방식인데 아주 소형이면서도 디지털과 아날로그 모두 볼 수 있는 재밌는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독특한 모양새에 더해 과학적, 역사적 가치도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시간을 확인하는 영침(影針·그림자 침)이 고정돼 있어 한 지역에서만 측정할 수 있었던 '앙부일구'와 달리 '일영원구'는 어느 지역에서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고 설명했다.

한쪽 반구에는 12가지 동물로 이뤄진 십이지(十二支) 표시와 96칸의 세로 선이 있는데, 하루를 12시 96각으로 표기한 조선 후기의 시각 법을 따른 것이다.

문화재청은 '자격루', '혼천시계' 등에도 비슷한 장치가 있는 점을 언급하며 "조선의 과학기술을 계승하는 한편, 외국과의 교류가 증가하던 상황에서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새로이 고안된 유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제작 시기와 제작자를 알 수 있는 유물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일영원구'에는 '대조선 개국 499년 경인년 7월 상순에 새로 제작했다'는 명문과 함께 '상직현 인(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1890년 7월 상직현이라는 인물이 만들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 따르면 상직현은 군사기관인 총어영(摠禦營)의 별장(別將), 별군직(別軍職) 등에 임명돼 국왕의 호위와 궁궐·도성의 방어를 담당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별군직은 조선 후기 국왕의 신변 보호를 담당한 관직으로, 상직현은 1880년 수신사(修信使) 일행으로 일본을 찾기도 했다.

그의 아들 상운(尙澐)은 청나라에 파견돼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화기를 들여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교수는 "상세한 기록은 나와 있지 않지만 '일영원구'를 넣고 다녔던 함(상자)이 있었을 것"이라며 "당시 (외국과) 개항하던 시기에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면서도 작품성까지도 담은 명품"이라고 설명했다.

조선 후기의 특성을 반영한 주조 기법과 장식 요소도 돋보인다.

4개의 꽃잎 형태로 만들어진 받침은 용, 항해 중인 선박, '일'(日)·'월'(月) 글자가 상감 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표면에 무늬를 파고 그 속을 은(銀) 등으로 채우는 방식이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일영원구'는 독창적인 작동 원리로 시각을 측정하는 휴대용 해시계"라며 "앞으로 깊이 있는 연구와 분석을 통해 한국 시계사를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문화재청과 재단은 지난해 말 '일영원구'가 경매에 나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자료 조사, 평가위원회 검토 등을 거쳐 경매에 참여해 지난 3월 낙찰받았다. 매입 자금은 복권기금을 활용했다.

해당 경매업체의 누리집에는 판매가가 6만8천750달러, 우리 돈 약 9천만 원으로 돼 있다.

어떻게 국외로 나갔는지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940년대 일본에 주둔했던 미군 장교가 사망한 이후 유족으로부터 유물을 입수한 개인 소장자가 경매에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영원구'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을 통해 19일부터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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