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 '고대 한국의 외래계 문물' 특별전...서역 유물 다수 전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지난달말부터 특별전 ‘고대 한국의 외래계 문물-다름이 만든 다양성’이 열리고 있다(내년 3월 20일까지). 고대 한반도와 외부 세계의 교류로 남겨진 유물을 소개한다. 중국 일본, 멀리 중앙아시아와 로마까지 다양한 시기와 경로를 거쳐 한반도에 유입된 외래계 문물 172건 253점(국보 2건·보물 6건)이 전시됐다. "역사 전시가 고유성·민족성·대표성을 주로 다루던 입장에서 벗어나 다양성에 초점을 맞췄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중국에서 난리를 못 견디고 동쪽으로 온 자가 많았는데 마한의 동쪽에 살면서 진한과 섞여 살았다", "석탈해는 왜국(倭國) 동북쪽 1000리 떨어진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아진포(영일만) 바닷가에 있던 할멈이 궤짝을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다." 이 같은『삼국사기』기록은 고대 한반도에 일찍부터 외부 이주민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사람의 이동은 당연히 유형·무형 많은 것의 유통을 낳는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9년(834년) 에머랄드·비취모(毛)·공작 꼬리·침향(沈香) 등 사치품 사용을 제한한다는 교서가 내려졌다. 이들 외국산 물품은 외부와의 교역이 활발했음을 말해준다.

특별전에 나온 검파형 동기·명도전(明刀錢)·오수전(五銖錢) 등은 중국과 인적 물적 교류가 대규모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고조선 멸망 후 설치된 한사군 중 4세기까지 이어진 낙랑군은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고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 받는다. 낙랑군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등은 이곳이 단순히 중국의 군현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토착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유물로 해석되고 있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된 일본 야요이·스에키 토기나 갑옷 등은 이 지역에 일찍부터 일본인이 드나들었고 일부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경주박물관 측에 따르면 중국의 중원-낙랑·대방-한반도-일본 열도로 연결되는 교류 네트워크가 상시화돼 있었다.
 

특별전에 선보인 일본의 야오이 토기.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 흔적이다. /국립경주박물관

 

 

 

국립 경주박물관 특별전에 나온 토우. 현재 한국인과 매우 다른 외모를 하고 있다.
국립 경주박물관 특별전에 나온 토우. 현재 한국인과 매우 다른 외모를 하고 있다.

 

신라에서 서역 관련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실은 신라의 지배층이 상당히 이질적인 외부인들로 구성됐다는 증거를 오래 동안 우리사회가 외면해 온 것뿐이다. 경주 월성에서 출토된 토우는 터번을 쓰고 있으며, 용강동에서 나온 토용이나 원성왕릉의 무인상은 우뚝 솟은 코와 덥수룩한 턱수염을 한 얼굴이다. 국제 상업 무대에서 활동한 소그드인(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에 거주한 이란계 민족)을 모델로 했다는 연구를 단순히 ‘설’ 취급하기 어렵다.

"어전에 나타나 가무(歌舞)를 하는 사람들 모양이 괴이하고 의관도 달라 사람들에게 ‘산해(山海)의 정령(精靈)’이라 불렸다"는 기록이나, 처용 설화 역시 이 무렵 페르시아 출신 이주민을 묘사했다는 학설이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보검과 유리잔 등은 신라의 교역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이다. 특별전을 통해 백제-중국, 신라-서역, 가야-일본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많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단군 조선 이래 한민족’은 인류사에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넘어서야 할 환상이다. 우리나라 거주 외국인 숫자가 250만명을 넘었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한편, 큰 틀에서의 가치관으로 통합된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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