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⑨ 갈등과 분열 뒤에 찾아온 탄압, 그리고 반성

보안사 앞세워 서노련·반제동맹당 사건 주동자 체포 가혹 행위 자행
재야 학생운동, '분파주의' 비판하며 반성...대중노선으로 전환 주장
'민주헌법 쟁취'·'직선제 개헌' 주류 차지...과격 투쟁 습성은 그대로

1986년 7월 경기도 부천경찰서에서 일어난 권인숙 성고문사건 규탄대회가 열린 서울 명동성당에 모인 시민들이 명동거리를 가득 메운채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86년 7월 경기도 부천경찰서에서 일어난 권인숙 성고문사건 규탄대회가 열린 서울 명동성당에 모인 시민들이 명동거리를 가득 메운채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86년 5월 3일 신민당의 개헌추진위 현판식이 인천에서 열렸다. 부산, 광주 등에서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 속에 진행된 신민당의 개헌추진위 현판식은 정국의 초점이었다. 인천과 경기의 개헌현판식이 열리는 인천시민회관으로 수도권 일대의 재야, 학생운동 세력이 총집결하였다.

오전부터 자민투, 민민투 학생들은 별도의 집회를 개최하여 "미제축출", "파쇼타도" 등을 외치며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학생들은 "신민당은 각성하라" 등의 구호도 함께 외치며 양 김 씨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다. 그로 인해 신민당 지도부는 현장에 진입할 수 없었고, 현판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신민당과 재야 학생운동의 갈등은 노선투쟁 때문이었다. 즉, 재야 학생운동에서는 신민당을 보수정당으로 규정하고 "보수정당이 주도하는 개헌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학생이 주도하는 개헌이 되어야 한다"는 ‘헌법제정민중의회론(이후 제헌의회론)’과 미국의 예속정책에 반대하는 ‘반미직접투쟁론(AI론)’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야 학생운동 노선에 김대중 고문이 "동의하기 어렵다"며 정면으로 비판했고,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청와대 회동에서 "좌익 학생들을 단호하게 다뤄야 한다"며 재야 학생운동과 단절할 것을 시사했다. 이에 재야 학생운동에서 신민당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고, 이러한 입장이 인천의 개헌현판식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신민당과 재야, 학생운동 세력 간에 형성된 ‘민주연합전선’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분열을 전두환 정권은 두고 보지 않았다. 신민당과 재야 학생운동의 분열을 활용하여 재야, 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은 5.3 인천시위를 폭력, 용공 시위로 몰고,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세력을 추적하여 체포 구속하였다.

수도권 공장지대가 밀집해 있던 영등포, 구로, 부천과 인천지역, 안양과 성남지역에서 살벌한 풍경이 펼쳐졌다. 특정 시점에 경찰병력으로 지역을 통째로 에워싸고, 대학생과 위장취업자들이 거주할만한 자취방 등을 마구잡이로 수색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이른바 ‘후리가리(경찰이 사람을 잡아들이기 위해 일제 단속을 하는 것)’라고 하는 것이었다.

권인숙양 성고문사건, 서노련사건, 반제동맹당 사건

그 과정에서 각종 권인숙 양의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 사건, 반제동맹당 사건이 발생했다.

권인숙 양에 대한 ‘부천 경찰서 성고문사건’은 5.3인천사태 주동자를 찾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당시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이었던 권인숙은 허명숙이라는 가명으로 부천의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위장취업’을 하였다. 86년 6월 4일 공문서변조 혐의로 부천경찰서로 연행된 뒤 지하 조사실에서 문귀동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부천경찰서에서 성고문을 당한 권인숙이 변호인인 조영래 변호사와 가해자인 문귀동 경장의 재판에 출석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부천경찰서에서 성고문을 당한 권인숙이 변호인인 조영래 변호사와 가해자인 문귀동 경장의 재판에 출석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6월 6일과 7일 문귀동은 ‘위장취업’과 무관한 5·3인천사태의 관련자 행방을 캐물으면서 권인숙에게 성적인 고문을 자행하였다. 이는 풀려난 권인숙이 조영래 변호사 등에게 경찰의 야만적 행동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권인숙은 독직폭행과 강제추행 혐의로 문귀동을 고소했고, 이제 맞서 공안당국은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삼는다"며 권인숙을 구속, 기소하였다.

이로 인해 문귀동의 성고문 사건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정권은 언론에 보도지침까지 하달하며 여론을 호도하려고 애를 썼다. 이에 여성단체와 인권단체들이 분노했고, 7월 19일에는 명동성당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및 김대중 용공 조작사건 폭로 규탄대회’를 열렸다. 이후 대법원에서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져 문귀동에 대한 재수사가 진행되었고, 문귀동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파면되었다.

서울노동운동연합(이하 서노련)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인 구로동맹파업으로 만들어졌다. 구로 동맹파업으로 44명의 노동자가 구속되고 1천여 명이 해고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단위사업장의 노동조합을 뛰어넘는 변혁적 노동운동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여기에 김문수, 심상정, 박노해 등이 시작했고, 학생운동 세력 중에서 유시민, 백태웅 등이 합류하였다.

서노련은 전위적 노동자 조직이 독재 종식을 위해 앞장서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은 1986년 5월 1일, 노동절을 기념하여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가두시위를 주도하였다. 5월 1일 가두집회와 5월 3일 인천시위 사태 직후 전두환 정권은 서노련을 국가보안법에 의한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은 보안사령부를 동원하여 관련자를 구속하고 고문과 가혹행위를 동원해 조직사건을 만들었다. 당시 보안사에서 진행된 서노련 관계자에 대한 고문과 가혹행위는 이후 부천서의 권인숙 양 성고문사건, 그리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전조현상과 같았다.

체포된 노동운동가들에게 구타와 전기고문, 물고문이 가해졌다. 김문수 전 지사의 증언에 의하면, "(여성이었음에도) 속옷만 남기고 옷을 벗게 하고 때렸다"며, "양팔을 포승으로 묶고 그 사이로 무릎이 들어가게 한 다음 목봉을 팔과 무릎 사이에 찔러넣는 속칭 ‘비녀꽂이’ 고문과 목봉에 매달리게 한 뒤 물을 붓는 ‘통닭구이’ 고문을 했다"고 한다.

관련자들이 구속된 후 서노련은 와해되었다. 이후 남겨진 사람들은 박노해 백태웅 등에 의해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하였고, 다른 그룹은 89년 노회찬, 주대환, 황광우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으로 합류하였다.

반제동맹당 사건은 1986년 10월 인천 부천지역에서 활동하던 박충렬, 이민영 등 대학생 출신 노동자 16명이 경기도 경찰 대공과에서 16일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은 사건이다. 이후 11월 13일 치안본부는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킬 목적으로 ‘반제동맹당(AILG)’을 결성하려던 대학생 출신의 노동자 16명을 검거하고, 관련자 20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하였다.

검찰은 "이들이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철폐, 자주적 민주정권 수립, 중요 산업의 국유화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 등 통일혁명당 강령을 수정해서 강령으로 채택하고, ‘반제동맹당’을 결성하려 한 이적단체"라며 기소하였다. 재판 결과 이들은 최고 7년까지 유죄 선고를 받았다. 이들을 고문한 것은 고문 기술자로 악명높은 이근안 등이었다.

반제동맹당 사건으로 수배를 받은 최동(성균관대)은 이후 89년 ‘인노회(인천부천노동자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문받은 뒤, 정신분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신이 당한 고문의 진상을 밝혀줄 것으로 요구하며, 90년에 한양대에서 분신 자살하였다. 인노회 사건은 최근 행안부 초대 경찰국장이 된 김순호 치안감이 연루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분열에 대한 반성과 대중노선의 등장

재야 학생운동과 야당인 신민당의 분열 갈등을 이용한 정권의 탄압이 지속되자, 재야 학생운동에서 ‘반성’과 ‘비판’ 움직임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반미직투론(AI론)’를 펼친 진영이었다. 그들은 두 가지 점에서 재야, 학생운동에 대해 비판했다.

1986년 10월 건국대에서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명이 농성을 벌이며 경찰 투입에 대비해 책걸상 등 집기를 불태우고 있다.
1986년 10월 건국대에서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명이 농성을 벌이며 경찰 투입에 대비해 책걸상 등 집기를 불태우고 있다.

첫 번째는 품성론이었다. 후에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이끈 김영환에 의해 저술된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강철서신’이었다. 그는 강철서신에서 얇은 지식을 가지고 잘난 체하는 지식인의 분파주의를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골방에서 팜플릿 제작에 골몰하며 분파주의를 일삼던 재야 학생운동권의 풍조에 경종을 울렸다.

두 번째는 대중노선으로의 전환이었다. 일반 국민이 이해할 수 없는 ‘헌법제정 민중의회’와 ‘반미직투’를 비판하며, 신민당에서 제기하는 ‘직선제 개헌’을 투쟁노선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5.30 팜플릿으로 알려진 문건에서 제기되었다.

두 개의 문건이 나온 후, 재야와 학생운동권은 급속히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 노선으로 기울었다. 즉,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투쟁을 회피하던 ‘준비론’적 경향을 비판하며 선도적 투쟁론(학생운동의 전망)이 중심을 이뤘다. 그런데, 개헌 투쟁에서 ‘선도투론’은 야당과의 연합전술을 포기하고 ‘헌법제정민중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비현실적인 투쟁노선을 걸었다.

이러한 ‘선도투론’이 직선제 개헌 등 대중노선에 의해 정면으로 비판받은 것이다. 이후 재야 학생운동에서는 ‘민주헌법 쟁취’ ‘직선제 개헌’이라는 대중노선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론적 노선이 변했다고 과격한 투쟁으로 치닫던 습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수가 NL노선으로 전환되었음에도 ‘과격투쟁 습성’은 그대로였다.

1986년 10월 28일에 벌어진 건국대 사태는 이론은 바뀌었어도 습성은 그대로라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민민투 본산이었던 연세대 등이 NL노선으로 전환하면서 자민투 계열은 학생운동의 주류가 되었고, 양적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이렇게 양적으로 늘어난 각 대학의 NL진영이 모여 ‘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결성식을 가졌다.

당시 고려대의 총학생회가 주축이었던 ‘애학투’는 "반공이데올로기 깨부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미자주화투쟁을 중심으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민주제 개헌 투쟁을 결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재야 학생운동과 신민당의 접근을 전두환 정권이 두고 보지는 않았다.

곧바로 경찰이 투입되고 진압이 시작됐다. 진압이 시작되자 학생들은 학생회관 피신해 들어갔고 옥상까지 쫓기게 되었다. 이에 정권은 ‘공산혁명분자의 난동’으로 규정하고 헬리콥터까지 동원하여 진압했다. 학생들도 그에 맞서 화염병과 책상, 의자를 집어 던지며 맞섰다.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고, 몇 명이 분신하고 투신했다는 이야기가 난무했다.

건국대 농성으로 애학투 학생들은 모두 연행되었고, 129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단일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수는 전 세계 학생운동 역사상 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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