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정의 길 따라...] 여름 가기 전 마지막으로 즐기는 태안

가는 여름이 아쉬운 여행객들이 만리포 해변에서 패들 보드를 타고 있다. 아직 해수욕을 즐길 수도 있다. 저녁이면 이 바다를 주홍색 노을이 뒤덮는다.
가는 여름이 아쉬운 여행객들이 만리포 해변에서 패들 보드를 타고 있다. 아직 해수욕을 즐길 수도 있다. 저녁이면 이 바다를 주홍색 노을이 뒤덮는다.

여름이 끝나 가고 있다. 아침저녁으로는 바람이 선선하다. 가는 여름이 아쉬운 분들께 태안을 권해 드린다. 아직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드넓은 바다가 있다. 저녁이면 이 바다를 주홍색 노을이 뒤덮는다. 걷기 좋은 길도 있고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기에 좋은 수목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해안사구도 있으니 꼭 가보시길.

노을이 내려앉는 해변이 있고 기름진 햇살이 가득 고인 갯벌이 있다. 갓 잡은 생선을 파는 어시장이 있고, 예쁜 수목원도 있다. 서해랑길 이야기다. 이 길은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시작해 서해안을 따라가며 구불구불 이어지다 인천 강화도 평화전망대에서 끝난다. 무려 1,800km를 뻗어나가는 초대형 트레일이다. ‘서해랑길’은 ‘서쪽(西) 바다(海)와 함께(랑) 걷는 길’이란 뜻. 김포·인천 강화·안산·아산·화성·당진·태안·서천·김제·군산·부안·영광·목포·진도·해남 등을 지난다. 태안에는 66코스에서 76코스까지 있고, 총길이는 약 187km에 달한다.

두웅습지.
두웅습지.

여유롭게 걷기 좋은 길

태안은 북쪽 이원면에서 남쪽 고남면까지 세로로 길쭉한 반도다. 학암포에서 영목항까지 리아스식 해안이 펼쳐진다. 어디부터 갈까. 태안 구간 지도를 보며 한참을 망설인다. 꾸지나무골이며 만리포, 어은돌 같은 어여쁜 이름을 가진 해변이라니!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파도리며 물닭섬 같은 다정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일단 북쪽 만대항에서 시작해 남쪽 어은돌까지 해안을 따라 내려가 보기로 한다. 72코스에서 시작해 68코스에서 끝나는데, 태안 뿐만 아니라 서해안의 모든 풍경을 모아 놓은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만대항. 72코스의 출발점이다. 이 코스는 꾸지나무골까지 이어진다. 만대항은 겨울 굴로 유명하다. 포구 인근에 굴 양식장, 염전 등이 마을과 어우러져 있다. 만대항이 자리한 가로림만 일대는 태안 바다 중에서도 어족의 산란장으로 유명하다. 우럭·노래미·농어가 쏠쏠하게 나오기 때문에 낚시꾼들도 많이 찾는다. 실제로 방파제 앞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이 많다.

꾸지나무골에서 시작해 학암포까지 이어지는 71코스는 ‘맛있는’ 길이다. 이 길에 태안을 대표하는 음식인 박속밀국낙지탕을 내는 식당이 많다. 원북면과 이원면 일대의 갯벌에서 박속밀국낙지탕에 들어가는 세발낙지가 많이 잡히기 때문. 박의 속으로 우려낸 말간 국물에 낙지를 넣고 한소끔 더 끓인 음식인데, 박속과 낙지가 절묘하게 만나 빚어낸 그 시원한 국물 맛은 한 번 맛보면 평생 잊히지 않는다.

학암포는 넓은 백사장과 암벽이 어우러져 있다. 느긋한 호미질로 해루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태안 갯벌에서는 바지락과 동죽이 많이 난다. 아이들과 함께 슬렁슬렁 호미질을 해도 한 바구니는 금방 캔다. 초가을 볕 아래 바지락을 캐는 엄마 아빠와 아이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풍경이 아닐까.

신두리 해안사구 탐방로.
신두리 해안사구 탐방로.

해안 사구가 만들어 낸 신비로운 풍경

학암포부터 70코스가 시작된다. 두웅습지와 신두리 해변, 신두리 해안사구를 거치는데, 서해랑길 구간 중 가장 신비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신두리는 수천 만 년 전 자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해안 사구다. 해안 사구는 해안 모래가 바람에 의해 육지 쪽으로 밀려 퇴적된 모래언덕을 말한다. 빙하기 이후 약 1만 5,000년 전부터 서서히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 최대 해당화 군락지로 통보리사초, 모래지치, 갯완두, 갯메꽃 등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한국에서 제일 넓은 모래 언덕이다. 내륙과 해안을 이어주는 해안사구는 해일로부터 완충 역할을 하며 육지의 생명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산책로는 크게 두 코스로 나뉜다. 입구에서 해안을 따라 직진해 모래 언덕 쪽으로 가도 되고 오른쪽 고라니 동산길을 따라 걸어도 된다.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모래 언덕 위에 목재 데크길이 놓여 있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하늘과 맞닿은 모래 언덕을 보며 이국적인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김한민 감독의 <최종병기 활>,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를 이곳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해안 사구 바로 앞은 신두리 해변이다. 누군가 자로 쭉 그어놓은 듯한 드넓은 수평선이 펼쳐진다. 물빛은 서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푸르다. 철 지난 파라솔이 우두커니 해변을 지키고 있다. 이곳의 모래가 오랜 세월 바람에 실려 가 해안 사구를 만들었을 것이다.

신두리 해변 가기 전, 두웅습지가 있다. 세계적으로도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2007년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람사르 습지에 등록됐다. 물자라·밀어·왕잠자리·흰뺨검둥오리·매자기·수련 등 수많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69코스에는 천리포수목원이 있다. 국내 최초의 민간 수목원이다. 1979년에 귀화한 독일계 미국인 고 민병갈(본명 칼 밀러) 설립자가 일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식물 종류를 보유한 곳으로, 국내 자생종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수집한 희귀 수목도 만날 수 있다. 습지원·수국원·호랑가시나무원·암석원·작약원 등 정원을 갖춘 수목원은 산책을 즐기기 좋다.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다. 서쪽 산책로는 바다를 보며 걸을 수도 있고, 바다로 내려가는 문도 만들어져 있다. 한 사람이 자신의 평생을 바쳐 뭔가를 이룩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은 없다.

만리포 해변을 산책하는 연인.
만리포 해변을 산책하는 연인.

여름을 마무리하는 주홍빛 노을

69코스의 끝은 만리포다. 서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한 곳이다. 여름 피서객이 빠져나간 해변은 조금이나마 한적하다. 여기까지 오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다. 조용히, 천천히 밀물이 들고 있다. 하늘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황금빛 속에서 청년들은 서프 보드를 탄다. 패들 보트를 탄 아이들이 일렬횡대로 지나간다. 도로에서 바다를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해변으로 내려선다. 아빠는 아이의 손을 잡고, 연인은 서로의 손을 잡고 바다 쪽으로 걸어간다. 시인 이상은 산골 마을의 노을은 엽서 한 장 크기만큼씩 온다고 했는데, 이곳 서해의 노을은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어느샌가 온 해변을 집어삼킬 듯 노을이 덮쳐 왔다.

8월 말의 어느 저녁, 올해도 벌써 삼분의 이가 지났지만,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아 아쉽지만, 그래도 지금을 좀 더 즐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 앞에서 우리는 즐기는 것 말고 도대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낙조 속 서퍼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젊은 시절로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순간만큼은 저들이 가진 젊음이 부럽다. 젊다는 건,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저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니까. 우리 생에는 가끔 맨발로 노을 지는 해변을 걷는 시간이 필요하다.

[ 여행 정보 ]

화해당 꽃게장.
화해당 꽃게장.

두루누비 홈페이지(https://www.durunubi.kr)에서 서해랑길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코스와 난이도, 소요시간 등을 미리 알아보자. 박속낙지탕은 원풍식당(041-672-5057)과 이원식당(041-672-8024)이 가장 유명한데 어느 집이나 맛은 비슷하다. 식당을 방문하기 전에는 미리 전화를 해서 낙지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화해당(041-675-4443)은 꽃게장이 맛있다. 태안 읍내에 자리한 ‘토담집’(041-674-4561)은 우럭젓국을 잘한다. 천리포 가까이 자리한 작은 포구인 모항항은 어민들이 직접 잡은 생선과 근처 갯벌에서 캔 조개를 파는 수산물직매장이 만들어져 있다. 태안에서 해산물이 가장 싼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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