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한국 정치사 배경...이정재-정우성 23년 만에 함께 출연
스릴러·액션 잘 묻어가 박진감...300만명 돌파 손익분기점 넘겨

해외팀 박평호 역을 맡은 이정재(왼쪽)와 국내팀 김정도 역의 정우성.
해외팀 박평호 역을 맡은 이정재(왼쪽)와 국내팀 김정도 역의 정우성.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인 ‘헌트’ 기세가 만만치 않다.

블록버스터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늦게 개봉했고 기대감이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5일 현재 328만 명을 동원해 이미 제작비 250억 원을 넘겼다. ‘헌트’ 개봉 전 일주일쯤부터, ‘태양은 없다’ 이후 23년 만에 함께 출연했다는 해시태그를 단 이정재와 정우성은 거의 모든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홍보가 제아무리 막강해도 영화가 별볼일 없으면 반짝 인기로 사그러든다. 관람료가 평일 1만5000원인데, 괜한 영화에 누가 돈과 시간을 투자하겠는가. ‘헌트’는 그런 우려를 넘어섰다. 가장 약체로 보였던 이 영화에 왜 평일에도 젊은 관객들이 모여드는가.

콕 집어 1983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세 번의 대규모 액션 장면이 비주얼을 ‘숨은 동림’ 찾기가 스토리를 담당한다.

첫 액션은 시작되자마자 바로다. 워싱턴 D.C.를 방문하는 쿠데타 주역 한국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가 드러난다. 현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다. M16 장총을 난사하는 시가전은 마이클 만 감독 ‘히트’(1995)에서 로버트 드니로와 발 킬머의 전설적인 도심 총격전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관객들 시선을 초반에 꽉 잡아매는 데는 성공적이다.

한바탕 굉음을 울린 영화는 안기부 내부로 들어선다. 내부 프락치가 있다는 정보를 두고 국내팀 차장 김정도(정우성)와 해외팀 차장 박평호(이정재)가 날선 대립을 보인다. 둘을 주축으로 양쪽 팀은 데칼코마니처럼 정확하게 나눠진다. 유능한 수하 장철성(박성태)과 방주경(전혜진)이 각각 포진하고 있으며, 영화 진행에 따라 군납업자와 여대생 조유정(고윤정)이 아킬레스건으로 등장한다.

70년대부터 안기부 내부에 있다는 동림이 누구겠는가, 궁금증을 밀어붙이듯 두 번째 액션이 터진다. 일본 도쿄. 총알이 빗발치고 자동차가 전복된다. 북한 거물급 인사가 귀순하겠다는 첩보를 듣고 해외팀이 접선하지만 성공 못하고 귀순자는 사살된다. 동림에 대한 의혹만 증폭된다.

액션장면이 없다고 긴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안기부에 끌려와 연속 따귀를 맞는 교수, 발가벗겨져 물고문·통닭구이를 당하는 대학생들이 ‘시대의 슬픈 액션’을 담당한다. 양쪽이 동림 찾기를 넘어 동림 만들기에 경쟁할 즈음, 북한 조종사가 미그16기를 몰고 귀순한다. 실제 있었던 이웅평 사건이다. 카메오를 자청한 황정민이 한 시퀀스를 마무리하는데, 얼핏 그가 주연한 영화 ‘신세계’(2013) 캐릭터가 보인다.

이제 서서히 동림의 정체가 밝혀진다. 그런데 웬걸, 동림과 비동림의 목적이 같다. 대통령 암살, 헌트다. 이어지는 반전, 북한에 속았다고 여긴 동림이 오히려 대통령 지키기에 들어간다. 마무리가 궁금한 지점에 마지막 액션이 터진다. 아웅 산 테러사건. 1983년 버마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을 태국으로 옮겨 대통령을 끝내 잡지 못한 김정도를 먼저 보낸다. 살아남은 박평호에게는 조유정이 총을 겨눈다. 하지만 정작 방아쇠를 당기는 건 순간 등장한 북한 공작원이다. 화면이 숨진 박평호에 머무는 사이 총성 세 발, 몇 초 쉬고 또 세 발이 울린다. 누가 누구를? 상상은 자유다.

이 영화는 1980-83년 한국 정치사가 기본 배경이 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후 12월 12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1980년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했다. 5월 18일에는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던 격동기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 긴박한 시기는 동람 찾기의 전사(前史)정도로만 역할한다. 특히 김정도 쪽이 심하다. 5·18 현장에서 당시 군인 김정도에게 군인 누군가가 말한다. "발포 명령이 떨어졌다." 다음 장면, 김정도가 즐비한 시체를 보고 눈시울을 붉힌다. 군인들 쿠데타 모의는 뻘쭘하게 서서 몇 마디 나누는 것으로 지나간다. 그에 비해 박평호는 일본에서의 시간, 영화 ‘색 계’의 탕웨이가 스을~쩍 묻어나는 조유정과의 관계 등 스토리 층이 좀더 다양하다. 당시 한국 상황은 판단이 조심스러운 반면 북한에 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 상상력이 발휘되어 그랬을까 싶다.

‘헌트’는 재미있다. 스릴러와 액션이 잘 묻어가고 편집 덕으로 전혀 지루하지 않다. 하지만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왔던 세대라면 묘한 상실감 혹은 실망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게 힘들게 버텨온 시대가 겨우 이 정도 ‘양념’이라고? 반면 이 시대를 모르는 MZ세대들은 말할 것이다. 뭔데 뭔데? 이웅 산 테러가 뭔데?

감독 이정재는 당시 시대를 잘 드러나지 않게 한 것을 "좀 다른 식으로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라고, "실제 역사를 등장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유튜브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렇다면 성공했다. 하지만 그 의도가 관객과 공유됐을까. 칸영화제에서 본 외국 관객도 서울에서 본 한국 관객도, 이야기는 복잡한데 속사정은 잘 이해되지 않고 눈은 정신없이 바쁘다. 80년대라는 회오리의 한복판을 버티는 인물들에게서 시대를 제외하면, 제대로 개인이 보여질 수 있을까. 장르영화로서 상업영화로서 성공했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영화에는 많은 카메오들이 출연하지만, 마지막 무렵 등장한 북한 공작원 역 배우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 찾아보니 이름은 임성재, 연극을 기본으로 한 배우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털보사장으로도 출연했단다.

☞'헌트' 속 역사

아웅 산 테러 :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에서 일어난 북한의 폭탄 테러.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했다. 대통령은 화를 면하고 서석준(부총리) 이범석(외무부장관) 등 고위인사 17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범인 3명 중 1명은 사살, 1명은 사형당했고, 나머지 1명인 강민철은 무기수로 복역 중 2008년에 옥사했다.

이웅평 귀순 : 1983년 2월 25일 조선인민군 공군 상위 이웅평이 미그 19 전투기를 몰고 월남했다. 북한의 기습공격인 줄 알고 전국에 공습경보가 발령됐다. 이웅평은 귀순 이후 공군에 복무했고 2002년 47세 때 지병으로 사망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교 묘역에 안장됐다.

동베를린 사건 : 동림은 동베를린의 한자어 동백림에서 따온 것이다. 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 예술인과 대학교수·공무원 등 194명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대남공작을 벌였다고 대대적인 수사가 이뤄진 사건이다. 중앙정보부가 관련자 203명을 조사했으며, 최종적으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없었다.

☞‘헌트’의 헌팅

액션 장면은 워싱턴, 도쿄와 태국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전부 국내 촬영으로 서울·부산·통영 등 전국 15개 지역 228개 장소에서 촬영했다. 워싱턴 D.C.장면에 등장하는 호텔은 서울 여의도에 있는 렉싱턴 호텔이다.

도쿄 장면은 부산 등지에서, 아웅 산 테러 장면은 강원도 고성 화암사 인근 유휴지에 태국풍 건물을 짓고 촬영했다. 롱샷에서 고성과 속초에 걸쳐있는 설악산 울산바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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