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의 폭등으로 식품기업들이 라면과 유제품 등의 가격 인상을 예고한 가운데 추석을 앞두고 서민 경제에 비상등이 켜졌다. 사진은 25일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는 모습. /연합

국내 1위 라면기업 농심이 추석 연휴 이후 신라면과 너구리 등 자사 제품의 가격 인상을 결정했다. 지난 4월부터 시작된 원·달러 환율의 폭등이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에 다른 식품업체들도 제품 가격 인상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식품업계에서 시작된 고환율 ‘쓰나미’는 국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25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최근 원·달러 환율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3년여 만에 1340원을 돌파하면서 고물가 속에 경기침체를 의미하는 스태그플레이션 공포를 가중시키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농심은 다음달 15일부터 자사 라면과 스낵 제품의 출고가격을 평균 11.3%, 5.7% 각각 인상한다고 밝혔다.

올해 2분기 농심의 국내 영업이익이 24년 만에 적자를 기록한 것도 제품 가격 인상에 영향을 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에 불닭볶음면의 수출 호조로 올해 2분기 매출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삼양식품도 가격 인상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라면과 함께 대표적 서민식품으로 꼽히는 아이스크림, 요구르트 등 유제품의 가격도 오를 가능성이 있다. 현재 국내 유가공업계 대부분은 유제품을 만들 때 수입 원유(原乳)를 주로 사용하는데, 우리나라의 수입 원유 의존도는 지난 2020년 기준 51.9%에 달한다.

일각에서는 원유를 재료로 사용하는 제과·음료류의 가격 인상도 점치는 등 ‘밀크플레이션’ 가능성까지 제기하고 있다. 밀크플레이션은 밀크(Milk)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로 우유값이 아이스크림, 커피, 빵값 인상을 불러오는 조짐을 일컫는 말이다. 제과업계에서는 지난 2013년 제품 가격을 인상한 이후 9년째 가격을 동결한 오리온이 가장 먼저 가격 인상 카드를 꺼내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제 막 코로나19의 충격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 국내 항공사들 역시 추석 특수를 앞두고 고환율 수렁에 빠지지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 대한항공의 경우 원·달러 환율이 10원 오르면 약 350억원의 외화 평가손실이 불가피하다. 아시아나항공도 284억원의 손실이 예상된다. 달러로 유류비와 항공기 리스료 등을 지급해야 하는 항공사로서는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배터리 업계도 상황은 마찬가지.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그리고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미국을 중심으로 배터리 공장의 신·증설을 추진하고 있는데, 환율 암초를 만나 계획에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 이들 배터리 3사는 환율 상승으로 기존에 예상했던 투자 규모가 급증하는 바람에 현지 공장 건립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LG에너지솔루션은 인건비 등 투자비용 상승 우려를 이유로 미국 애리조나에 1조7000억원을 들여 배터리 단독공장을 짓기로 한 계획을 재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부자재를 수입해 대기업에 납품하는 국내 중소기업들도 고환율은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중소기업들은 환율 인상분이 납품단가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비용 부담을 그대로 떠안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이유로 원·부자재 가격 상승 폭 만큼 납품단가에 반영하는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고환율의 여파로 국내 산업 전반의 물가가 급등하면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정치권에서는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류성걸 국민의힘 물가·민생안정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우크라이나 사태, 기후위기 등으로 식품 원재료를 포함해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추석을 앞두고 국민께 부담을 조금이나 덜 수 있도록 정부와 함께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11일 민생안정대책을 발표하는 등 물가 안정을 위해 총력을 다하겠다는 방침이다. 정부가 마련한 민생안정 대책은 농축수산물 비축물량 공급, 긴급 생활지원금 지급 대상자 발굴, 근로·자녀장려금 조기 지급 등이 골자다.

방기선 기획재정부 차관은 "관계기관 합동 성수품 수급안정대책반을 운영해 20대 성수품의 수급·가격 동향을 일일 점검하고, 이상징후 포착 땐 비축물량 추가 방출 등으로 즉각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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