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진
이낙진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중등학교 교과교육의 혁신을 위한 교육과정을 연구하는 기관이라고 스스로 정의하고 있다. 일반인들은 수능 출제하는 곳 정도로 알고 있는데, 몇 자 안 되는 소개란에 혁신연구하는 기관을 함께 넣은 걸 보면 딴 데 정신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이 평가원이 생명과학20번 문항(20)’ 파문으로 국내외 주목을 받았다. 수험생들의 오류 주장에 조건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교육과정 성취기준을 준거로 학업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 타당성이 유지된다고 뭉개다 일이 커진 것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수험생들은 직접 공론화를 주도하며 평가원을 상대해 나갔다. 20번 정답결정처분 취소 행정소송과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수험생 92명 등은 소송 제기 이후부터 국내외 석학과 교수, 고교 교사에게 이메일을 통해 질의서를 보냈다. 집단유전학(Population Genetics) 분야 세계 최고 석학인 조너선 프리처드(Jonathan Pritchard) 프린스턴대 빙 석좌교수(Bing Professor)의 답변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다. 프리처드 교수는 연구실 매튜 아기레(Matthew Aguirre) 연구원이 내놓은 풀이 결과를 공유했다. “터무니없이 어렵고 사실 푸는 것이 불가능하다.”

수능 문제가 문제 된 것은 2004, 2008, 2010, 2014, 2015, 2017년에 이어 7번째다. 논란 후에 대부분 복수 정답 또는 전체 정답으로 처리됐다. 2014학년도 세계지리 8번 문항 오류는 소송으로 이어져 1년 뒤 등급 결정처분 취소판결이 났다. 지난해 수능 때는 코로나19로 대입 일정을 2주 순연했으나 3월에 공지돼 큰 소동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교육부와 평가원의 안일한 대처가 혼란을 부채질했다. 20번 오류를 주장한 수험생들은 지난 2일 법적 대응에 나섰지만, 평가원은 성적 통지 하루 전인 9일 브리핑에서도 “(가처분 인용 여부에 대한) 시뮬레이션 절차를 가지지 않았다고 당당히 실토했다.

이뿐 아니다. 매년 반복되는 것이지만 올 수능은 난이도 조절에도 완전히 실패했다. 오죽하면 여태 가만히 있던 여당 의원이 불수능, 물수능 냉탕 열탕을 오가는 폐해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절대평가, 자격시험화 등의 수능에 대한 미래형 개편을 추진하고 출제위원도 교수 중심에서 현직 교사 중심으로 재편돼야 한다고 지적했을까. ‘사교육걱정없는세상교육과정을 벗어난 문항은 학생들이 사교육기관을 찾게 하고 사교육비를 지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교육 불평등으로 이어진다고 거들었다. 입 가진 사람이 한마디씩 하자 평가원장 강태중은 출제자들이 예상했던 것과 학생 체감이 달랐다는 말장난 비슷한 사과를 하다 법원 판결 후 물러났다.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장판사 이주영)15“(20번은) 명백한 오류가 있고, 이는 수험생들이 정답 선택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적어도 심각한 장애를 줄 정도에 이른다며 정답취소 판결했다. 이번 사태는 국가고사(國家考査)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전체 수험생에 회복 못 할 피해를 안겼다. 수험생의 12년 공부와 그들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치는 수능제도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교훈도 줬다. 우리나라의 평가원 역할을 하는 일본 대학입시센터(DNC)’대학 입학자 선발 개선을 도모해 교육진흥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제라도 평가원은 교육의 혁신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대신 제 할 일이나 제대로 하겠다는 자세를 다잡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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