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 글 최응표 한국사바로알리기미주본부 대표/ 영역 남신우 북한인권국제연대 대표
  • 승인 2019.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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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9주년 특별기획] [15]

국토의 90%가 이미 북한군에 점령당하고 대구와 부산만이 남은 상태에서 벌어졌던 낙동강 전투는 국가 존망의 운명이 걸린 대결전장이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전에서 우리는 특히 다부동 전투를 기억해야 합니다. 낙동강이 대구 방어선의 핵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김일성은“ 우리의 승리는 목전에 다다랐다.”며 광복절 5주년이 되는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라고 독촉하던 때였습니다.

한편 맥아더 장군은 방어선이 갑자기 무너지면 대통령이 죽거나 포로가 될 수 있다고 염려하였고, 워커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이 대구를 떠나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만큼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마지노선이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사수해야 하였고, 북한군은 부산으로 진격하기 위 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돌파해할 저지선이기 때문에 양측 모두 사활을 건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처럼 양측의 혈투로 낙동강이 피로 물들어갈 때, 백선엽 장군의 제1사단은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 일대에서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3개 사단)과 최후의 방어 전투를 벌였습니다. 다부동 전투가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피부로 느끼게 하는 백선엽 장군과 박명림 교수와의 대담 일부를 소개합니다.

◇다부동 전투, 낙동강 전선 사수의 결정적인 싸움

1950년 8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일대에서 발생한 전투로써 6.25전쟁 중 가장 위대하고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1950년 8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일대에서 발생한 전투로써 6.25전쟁 중 가장 위대하고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박명림 교수 :“ 김일성은 단기간에 부산을 점령하려 했는데 미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이 장기화 됐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3번이나 남한에 내려와 승전을 독려했습니다. 북한이 적화 통일에 실패하고 전쟁이 장기화한데는 낙동강 전선, 특히 다부동에서의 필사적인 저항의 기여가 컸습니다. 다부동 전투는 냉전 초기 동아시아 공산 진영에 대한 동아시아 자유 진영을 지킨 전투였습니다.

북한군 3개 사단 2만 1,800명을 1개 사단 7,500명이 사활을 걸고 55일간의 전투를 벌여 끝내 방어선을 지켰습니다. 이 전투에서 5.690명의 인민군과 2.300명의 국군이 전사했습니다. 이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전세 역전의 결정적 계기였으며 자유 진영을 지켜낸 세계적 전투였습니다.

백선엽 장군 : “다부동이 뚫리면 최후 방어선이 무너지는 형국이었죠. 이 때문에 국군1사단에 이례적으로 미25사단의 27연대와 미 2사단의 23연대를 배속해주었고, 국군 8사단 10연대도 지원해주었습니다. 미군은 후방에서 전차와 대포 지원을 해줬고, 전방 전선에서는 연일 육박전을 벌여 양측의 피와 땀이 땅을 적셨습니다.

당시 미 27연대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1사단 11연대 1대대가 이틀간 굶은 끝에 진지를 철수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에 미군에서는 내게 전화를 걸어“ 우리도 빠지겠다”고 통보해왔어요. 당시 말라리아를 앓던 나는 지프를 타고 달려가 산을 내려오는 부하들에게“ 여기서 후퇴하면 갈 곳은 부산 앞바다밖에 없다. 내가 선두에서 돌격할 테니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고 외치며 권총을 뽑아들고 돌진했습니다.

이를 본 마이켈리스 대령(한국군은 도대체 싸울 생각이 있느냐? 고 비난했던)은 감탄하며 사과했지요. 당시 연대장 이상은 지휘만 했지 사단장이 돌격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박명림 : 당시 나이 어린 국군과 인민군들이 싸웠던 다부동 현장을 답사하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말씀 중에 부하들보다 앞장서서 돌격하면서“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쏘라”고 말 한 대목이 감동적입니다.

백선엽 : 그 행동은 미군이 한국군을 신뢰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다부동, 세계와 동아시아 운명 좌우

박명림 : 당시 다부동은 세계와 동아시아의 운명을 좌우한 전장이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살아남은 자의 훈장은 전사자의 희생 앞에서 빛을 잃는다”“ 지옥의 모습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많은 시체들을 넘고 넘어 국군은 북진을 시작했습니다.

백장군의 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해 북한군의 8월 공세를 저지했습니다.

결국 다부동 전투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의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공세이전의 계기를 포착하여 다른 유엔군 부대들과 함께 반격 작전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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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판]

“If I Retreat, Shoot Me in the Back!”

90% of South Korea was taken by the North Korean army. Only Taegu and Pusan were left. No more space to retreat. The battles along Naktong River were the final defense which would determine the fate of S. Korea, live or die Of all the battles during the Naktong River fights, we must remember the Dahboo Dong battle.

Kim Il Sung also knew well that the Naktong River defense was to defend the City of Taegu. Kim Il Sung pushed the Red Army very hard, “Victory is in our hands!” He ordered the army to take the City of Taegu by August 15th, the 5th anniversary date of Liberation from Japan.

General MacArthur was concerned about the safety of President Rhee. If the defense line collapses, the President could be killed or captured by the enemy forces. The situation was so dangerous that General Walker concluded President Rhee should leave the City of Taegu.

The Naktong River defense was the Korean Maginot Line, which had to be defended no matter what it cost. The North Korean army had to break the Maginot Line no matter what it cost in order to push forward to Pusan Port. Both sides knew what it meant and fought with everything they had.

While Naktong River was filled with blood from both sides, General Paik Sun Yeop and his 1st Division were fighting against the 3rd Division of the 2nd Corps of the N. Korean army reinforced by the 105th Tank Division at and around Wae Gwan and Dahboo Dong, northside of Taegu.

In order to make the readers understand how bloody the Dahboo Dong battle was, we cite the interview between General Paik and Professor Park Myeong Rim.

Prof. Park Myeong Rim: Kim Il Sung planned to advance and occupy Pusan in a short period of time as quickly as he could, but the war dragged on after the U.S. forces joined in and intercepted. Kim Il Sung visited S. Korea three times and pushed and encouraged his army for a quick victory.

Dahboo Dong battle played a key role to block the N. Korea’s unification plan, and to turn the war into a total long term fighting. This battle kept the free world in East Asia against the Communist aggression in East Asia.

General Paik Sun Yeop: “If Dahboo Dong was penetrated by the enemy, the whole defense line would have collapsed. It was a very unusual measure that the 27th Regiment of the U.S. Army 25th Division and the 23rd Regiment of the U.S. Army 2nd Division came to support the ROK Army 1st Division. The 10th Regiment of the ROK Army 8th Division also came.

The U.S. Army supported us with their tanks and artilleries from the rear, and we fought at the front with our physical bodies. Blood and sweat soaked the battlefield. The 1st Battalion of the 11th Regiment of the 1st Division was protecting the left flank of the U.S. Army 27th Regiment. They fought without food for two days, and were ready to withdraw. The U.S. troops called me to inform they too were going to withdraw.

I was sick with malaria at the time, but jumped into a jeep and ran to the frontline. I shouted at the soldiers, “If we run away from here, there is no place to go except for the sea at Pusan Port. I will lead the charge against the enemy.

If I retreat, you shoot me in the back!” I ran with a handgun in my hand. Colonel Michaelis of the U.S. Army who accused before that the Korean army had no will to fight saw me charge and later apologized. At that time, no division commanders led any actual combat charges.

Prof. Park: I surveyed the Dahboo Dong battlefields later where the young soldiers fought and died against the superior enemy force. I cried walking on the field. War is fought by humans. I was very moved when I heard that you charged in front of the soldiers, “If I retreat, you shoot me in the back!.”

General Paik: The U.S. army began to trust us, the ROK army, after that incident.

Prof. Park: Dahboo Dong battle at the time changed the destiny of the world and Far East Asia. General Paik, you wrote later that, “Medals on the survivors lost their glow looking back all the brave dead soldiers,” and recorded that, “Hell cannot be any worse than the scenes of the Dahboo Dong battles.”

The ROK soldiers began their advance toward north treading on the corpses of their fellow soldiers. The 1st Division led by General Paik Sun Yeop fought against the three enemy divisions, and kept the defense line intact connecting the 328th Height – Soo Ahm Mountain – Yoo Hak Mountain – the 741st Height, which made it possible to keep the City of Taegu from the enemies.

The ROK Army 1st Division kept the main defense line of Yoo Hak Mountain and Dahboo Dong from the N. Korean 3 divisions for 25 days of nonstop battle. The North Korean aggression of August was stopped at the Dahboo Dong.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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