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정의 길 따라...] 경북 안동 하회마을

한옥, 그 느긋한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
기와집·초가집이 담장·골목사이로 옹기종기 자리
옛모습 간직한 북촌댁, 겸손·나눔 정신도 오롯이
송암계곡에 자리한 만휴정엔 '수묵화 비경' 장관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북촌댁.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북촌댁.

한옥의 아름다움에 대해 갸웃해 하던 때가 있었다. 웅장하지도 않고 섬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화려함이라야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집을 사람들은 왜 아름답다며 무릎을 치며 감탄하는 것일까.

문짝은 아귀가 맞지 않고 마룻바닥은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집. 마당 한 편엔 잡초가 아무렇게나 자라는, 살아가기엔 불편함이 이만저만함이 아닌 집. 한옥하면 드는 생각은 사실 이랬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십수 년 간 취재 여행을 다니며 한옥에서 한밤 자고 두밤 자봤더니, 살포시 쳐든 처마며 저물녘 햇살이 스미는 창호지 문을 렌즈에 담아봤더니, 한옥만큼 그윽한 집이 없었고 몸이며 마음을 보듬어주는 집이 없었다. 아, 이래서 한옥을 아름답다고 하는구나. 어느 날인가는 대청마루에 앉아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한옥의 매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단연 안동 하회마을이다. 조선시대 대학자인 류운용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고 흘러 하회(河回)라는 지명을 얻었다.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 연화부수형, 행주형에 해당하는 하회마을에는 현재 기와집 160여 채와 초가집 210여 채가 담장과 골목을 사이에 두고 정담을 나누고 있다.

북촌댁 운치 가득한 마루.
북촌댁 운치 가득한 마루.

하회마을 길 자락을 따라 거닐다 보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북촌댁에 닿는다. 하회마을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중심으로 오른쪽을 북촌, 왼쪽을 남촌이라고 하는데, 북촌댁은 이 북촌의 중심이다. 요즘이야 한옥들이 저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치고 개량을 했지만 북촌댁은 옛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큰 사랑인 북촌유거(北村幽居)는 집안의 웃어른인 할아버지가 거주하던 사랑이다. 누마루에 앉으면 하회마을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간 사랑인 화경당(和敬堂)은 경제권을 가진 바깥주인이 기거하던 방이다. 화경당의 의미는 가족과 친족 간에 화목하고 임금과 어른을 공경하라는 의미. 석봉 한호의 글씨체를 채자해 편액을 만들었다. 안채는 안주인이 기거하던 곳이다.

한옥으로는 드물게 2층 구조로 돼 있는데, 단일 건물로는 우리나라 민가 중 가장 크다. 규모도 규모지만, 북촌댁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옛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점에서 더 경이롭다. 큰 계단을 오르듯 다리를 높이 들어야 넘어설 수 있는 중문의 문지방과 아직도 나무로 불을 때서 밥을 짓고 방을 덥히는 아궁이, 안채와 중사랑, 작은사랑이 ㅁ자형으로 배치된 구조 등은 반가의 옛 살림을 고스란히 증거한다.

북촌댁의 아궁이 난방을 고집하는 이유는 집을 보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장작에서 나는 연기가 집을 훈연해야 나무가 썩지 않고 벌레도 먹지 않기 때문이다. 식사 대접도 별도의 행랑채에서만 한다. 집에서 음식을 차리고 식사를 하면 냄새가 배어 집이 훼손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집뿐만 아니라 가문에 깃든 적선(積善)의 전통도 감동적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이다. 경상도사를 역임한 류도성은 3년 동안 갈무리해 둔 춘양목을 홍수로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아낌없이 강물에 밀어 넣었다. 북촌댁 사람들은 작은 사랑에 ‘수신와’(須愼窩)라는 편액을 걸어두고 후손들의 교만을 경계했다. ‘수신와’란 움집에 사는 듯이 삼가라는 뜻으로 번듯한 기와집에 산다고 교만하지 말고 어렵게 사는 이웃을 생각해서 언제나 삼가고 자신을 낮추라는 경계의 말이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이같은 정신은 류씨 가문을 멸문의 위기에서 구하기도 했다. 동학난이 일어났을 때다. 하회마을에도 동학군이 밀어닥쳤고 류씨 집안에도 들어왔다. 하지만 동학군들은 류씨 댁의 배려로 수많은 소작들이 춘궁기를 버텨내고 살아날 수 있었다며 오히려 큰 절을 하고 돌아갔다. 다른 지주들은 소작농들에게 6할의 소작료로 거둬들이는 데 비해 류씨 집안은 평년에는 5할, 흉년이 들면 4할만 받았기 때문이다. 구한말엔 독립운동에 많은 재산을 내놓고 몸소 투신하기도 했다.

수묵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풍경

우리 전통 건축을 이야기할 때 병산서원을 빼놓을 수 없다. 서애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 정경세 등 후학들이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해 사묘인 존덕사를 짓고 향사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주차장에서 서원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걸어가면 솟을대문이 나타난다. 복례문(復禮門)이다. 복례문의 이름은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왔다. 세속 된 몸을 극복하고 예를 다시 갖추라는 뜻이다. 복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으로 길게 선 만대루 아래를 지나게 된다. 만대루 아래로 난 급경사 계단을 따라 고개를 숙이고 지나면 강당인 입교당과 만난다. 입교(立敎), 즉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이다.

가을이 오는 안동 들녘.
가을이 오는 안동 들녘.

입교당 마루에 앉는 순간 병산서원의 모습은 바뀐다. 앞으로는 만대루의 시원하게 펼쳐진 지붕 위로 병산(屛山)이 솟아있다. 병산은 산의 모습이 병풍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만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병산서원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 마루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200명은 족히 앉을 수 크기. 천장에는 굵은 통나무 대들보가 물결치듯 걸쳐 있다. 통나무의 휘어짐을 최대한으로 살려냈다.

만대루는 그야말로 텅 빈 공간이다. 누각을 지탱하는 기둥과 지붕만이 구성체의 전부다. 장식적 공간 역시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병산서원은 우리 전통 건축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여백미의 최고점을 보여준다.

송암계곡에 자리한 만휴정에도 가보자. 너럭바위를 느긋하게 흘러내린 물이 폭포수로 떨어지는 빼어난 운치 속에 자리한다. 폭포의 시원한 물길과 단아한 정자가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며 상상 속의 수묵화에서나 볼 수 있는 비경을 펼쳐놓는다. 마흔아홉의 늦은 나이 대과에 급제해 쉰이 넘어서야 벼슬길에 올랐던 보백당 김계행. 예순일곱까지 관직에 있었지만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겠다’는 사직소를 올리느라 바빴다. 그러다가 무오사화 이후 일흔한 살이 돼서야 고향으로 돌아와 만휴정을 짓고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저물 만(晩)’에 ‘쉴 휴(休)’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늦은 귀향’의 소회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자로 가기 위해선 계곡을 가로지르는 아슬아슬한 통나무 다리를 지나야 한다. 비틀비틀 다리를 건너 쪽문을 열고 만휴정 대청마루에 앉으니 신세계가 따로 없다. 바람도, 새소리, 사람의 발걸음도 자유롭게 드나든다. 잠시나마 정자의 주인이 되어본다.

[ 여행 수첩 ]

안동 찜닭골목.
안동 찜닭골목.

안동 구시장에 자리한 ‘옥야식당’(054-853-6953)은 선짓국으로 유명하다. 신선한 선지와 고기가 푸짐하게 들어있다. 고추기름을 듬뿍 넣은 국물이 칼칼한 맛을 낸다. 딸에게 2대 전승이 되었지만 아직도 국물에 넣을 재료를 손질하고 그릇에 국밥 말아내는 일은 나이 많은 창업주가 일일이 챙기고 있다. 안동찜닭도 별미. 찜닭골목이 따로 만들어져 있다. 시내의 맘모스제과(054-857-6000) 전국 3대 빵집으로 불리는 곳. 크림치즈 빵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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