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분의 1의 기적, 인천 상륙 작전
5천분의 1의 기적, 인천 상륙 작전
  • 글 최응표 한국사바로알리기미주본부 대표/ 영역 남신우 북한인권국제연대 대표
  • 승인 2019.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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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9주년 특별기획] [16]

1950년 6월 29일, 한강 둑에 서서 전쟁의 실상을 직접 살펴본 맥아더는‘ 코브라처럼 공격해오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전선의 허리를 끊어 적을 고립시키는 인천 상륙 작전을 구상했습니다.

하지만 인천은 상륙 작전을 펼치기에는 지리적 조건이 최악이었습니다. 미 합참은 물론 상륙작전 전문가들도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률 을 5천분의 1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반대가 심했습니다. 워싱턴에서는 맥아더를 설득하기 위해 특별 사절단을 보내 인천보다 더 좋은 상륙 지점들을 추천했지만, 맥아더의 결심은 단호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만큼 그렇게 빨리 적의 중추 신경을 타격할 만한 곳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최고의 작전이다.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들을 설득하자 반대하던 미군 수뇌부도 맥아더의 결정에 동의했다.

[적색해안에 상륙하는 미 제5해병연대 병사들]
[적색해안에 상륙하는 미 제5해병연대 병사들]

마침내 8월 28일, 작전 18일을 앞두고‘ 크로마이트 작전-chromite’으로 명명된 인천 상륙작전은 국방부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병력 7만5천, 전함 261척이 동원되는 대규모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 뒤에는 학도 의용군 772명의 처절하고 애틋한 희생이 담긴‘ 장사 상륙 작전’과 팔미도 등대 점화 사건이 있었습니다.

◇장사 상륙작전, 학도병 772명의 고귀한 희생

▲ 인천상륙작전에 가려진 학도병들의 전투 ‘장사상륙작전’을 아시나요. 미군도 육군도 마다한 위험한 임무를 772명의 학도병들이 해냈습니다. 하지만 이 비밀작전은 한동안 잊혀진 역사로 남았습니다. 사진은 트럭을 타고 전선으로 향하는 학도병들.
▲ 인천상륙작전에 가려진 학도병들의 전투 ‘장사상륙작전’을 아시나요. 미군도 육군도 마다한 위험한 임무를 772명의 학도병들이 해냈습니다. 하지만 이 비밀작전은 한동안 잊혀진 역사로 남았습니다. 사진은 트럭을 타고 전선으로 향하는 학도병들.

장사 상륙 작전은 한마디로 북한군의 병력과 시선을 동쪽의 장사로 집중시켜 서쪽의 인천에서 대규모 상륙 작전을 성공시킨 일종의 성동격서(聲東擊西-동쪽에서 소리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 작전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772명 학도병 대부분이 사망, 부상, 행방불명으로 희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은 정말 값진 희생이었습니다. 이들 군번 없는 전쟁 영웅 772명 학도병의 희생은 인천을 확보하고 서울 탄환의 길을 여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습니다. 팔미도 등대 점화 사건도 있습니다. 당시 인천 주변 영흥도를 중심으로 한국군과 함께 첩보 활동을 펼쳤던 켈로 부대원들은 1950년 9월 10일 밤 팔미도에 잠입해 팔미도 등대를 조사했습니다. 팔미도 작전에 직접 참여했던 켈로 부대원 최규봉 씨의 증언을 통해 팔미도 등대 점화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작전 중 좌초된 LST 문산함(영덕군 장사리 해안, 1950. 9. 13)
▲작전 중 좌초된 LST 문산함(영덕군 장사리 해안, 1950. 9. 13)

“당시 팔미도 등대를 밝히지 않으면 배가 인천항에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밑에 암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뱃길이 있는데, 팔미도 등대 옆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배 밑의 암초들 때문에 군함들이 들어올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극동군 사령부의 한국 켈로 부대를 투입시켰습니다.

이들은 비밀리에 잠입해 팔미도 주민들의 인심 얻는 작전을 펴 주민들의 도움으로 얻은 정보를 근거로 팔미도 탈환 작전에 성 공해 등대에 불을 밝힘으로써 인천 상륙 작전을 가능케 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해 서울을 점령하면 적의 병참 체계는 쉽게 무너진다고 믿었습니다.

▲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
▲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

그렇게 되면 낙동강 전투에 집결돼 있는 적군의 전투력은 마비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을 거두자, 미 제10군단은 공격 다음날에 인천 지역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서울로 진격하여 9월 27일에는 서울을 점령하였습니다.

이 작전과 더불어 실시된 낙동강 전선에서의 반격 작전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미 제7사단의 제 31연대는 수원 비행장을 확보하고 미8군의 린치(Lynch) 특수 임무 부대와 연결을 이룸으로써 남침한 북한군의 전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작전은 개전 이후 그때까지 수세 일변도였던 한국군 및 유엔군의 입장을 공세적으로 전환시키게 된 획기적인 작전이었습니다. 6.25전 쟁이 끝난 후 맥아더 장군은 학도병 772 유격 동지회에 순수하고 고귀한 정신을 기억하자는 감사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종훈 회장 귀하

최근에 보내주신 귀하의 편지를 통해 772 유격 동지회가 결성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귀하의 동지들이 수행한 전투는 혁혁한 것이었습니다. 772 유격대의 동지들이 보여준 용맹과 희생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영원히 빛나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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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

The Miracle of 1/5,000: Incheon Landing Operation

On June 29, 1950, General Douglas MacArthur, after inspecting the battle front himself standing on the banks of Han River, determined he would need an extreme measure in order to stop the onslaught of the North Korean army attacking like cobra snakes.

He was already thinking about cutting the enemy forces in half by landing at Inchon Harbor thereby isolating the North Korean forces in the south. However, Inchon was the worst place for a landing operation geologically.

Including the U.S. Joint Chiefs of Staff, all the experts on amphibious landing operations were against it expressing concerns like the success probability would be 1 in 5,000. They objected vigorously. Washington, D.C. sent a special delegation to convince and recommend to Gen. MacArthur another landing point, but MacArthur was adamant.

He said there was no other place like Inchon, from where he could strike the central nerve of the enemy’s. General MacArthur said, “Exactly because it looks totally impossible to land at Inchon, this operation will succeed. There is no other place.”

MacArthur persuaded all others that he was right, and even the top military leaders were persuaded and came to agree with MacArthur. On August 28th, 18 days before the operation day, the Defense Department approved the Inchon Landing named, “Operation Chromite.”

Behind the success of Inchon Landing Operation, there was the tragic and heartbreaking story of 772 student volunteers who sacrificed themselves at the Jangsa Landing Operation. The Jangsa Landing was a fake landing operation to attract the resources and attention of the North Korean troops to the east side of Inchon, where the real landing was to take place in the west side of Inchon.

Most of these 772 student volunteers were killed in action, got injured, or missed in action. This however was a true invaluable sacrifice to the main operation. They were no regular army soldiers, but all of them 772 students fought like true heroes. They played a decisive role in the landing at Inchon and in opening the access to the capital city of Seoul.

There was the operation to turn the light on at the Palmee Island lighthouse. The KLO Unit (Korean Liaison Office) was working on gathering intelligence with the Korean troops around Young Heung Island near Inchon. They went to Palmee Island secretly in the night on September 10, 1950, and inspected the lighthouse there.

We can understand how important it was at the time, lighting at the Palmee Island lighthouse, according to the testimony from Mr. Choi Gyu Bong, a member of the KLO unit who participated in the Palmee Island Operation. “It was impossible to get into Inchon Harbor without the guide of the lighthouse at Palmee Island. There were reefs everywhere under the water.

There was sea lanes navigable only when the light is lit at the Palmee Island lighthouse. The landing boats needed the lighthouse guide. General MacArthur assigned The KLO Unit in the Far East Command into this operation. They went into Palmee Island secretly, and befriended the local residents.

They were able to get intelligence information from the locals, and were able to light the lighthouse when the landing operation began. Inchon Landing Operation was a huge success. The X Corps of the U.S. Army secured the beachhead the day after the landing, and proceeded and recovered Seoul on September 27th.

With this operation, the Korean and the U.N. forces who were on defensive always until then, turned around and became the offensive forces, which changed the course of the Korean War completely. After the Korean War, General MacArthur wrote a letter of appreciation to remember the pure and noble sacrifices by the 772 student volunteer soldiers at the Inchon Landing Operation.

Dear Chairman Lee Jong Hoon; I was delighted to receive your letter of recent date telling of the formation of the 772 Volunteer Comrades Club. The operation they performed in support of Inchon Landing was a brilliant one and worthy of the highest commendation. The valor and sacrifice of its member will always be a shining example for the youth of Korea. Please extend to its members my heartiest greeting and affectionate regards. I shall always remember them as loyal and devoted comrades-in-arm.

With best wishes, Most Sincerely,

Douglas MacArthur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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