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승만시대(2) 상투 자른 개화청년,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 창간
[연재] 이승만시대(2) 상투 자른 개화청년,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 창간
  • 이주영 교수
  • 승인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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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학당 입학, 영어조교...상투를 자르다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

저자 이주영(李柱郢): 
건국대 명예교수.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공동대표.
1942 평북 용천 출생. 인천중-제물포고 졸업
서울대-서강대-하와이대 사학과 수학
프린스턴대-콜럼비아대 사학과에서 연구
역사학회-한국 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건국대 사학과 교수,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주요저서: 미국의 좌파와 우파/ 미국사/ 미국현대사의 흐름/ 빼앗긴 서양문명의 역사/ 빼앗긴 우리역사 되찾기/ 한국현대사 이해/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과거시험에 모든 희망을 걸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모든 조선인들처럼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다. 어머니는 당시의 보통 아낙네들처럼 어린 아들을 데리고 절에 다녔다. 그 절들은 북한산 대남문 밑의 문수사와 옥수동의 미타사였다. 나중에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1957년에 82세의 나이로 문수사까지 걸어 올라갔고, 그 때 써 준 현판이 그 절에 아직 보존되어 있다.    

그런 전통적인 집안에서 서양 의학을 알게 된 것은 큰 충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집안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변화의 불씨를 던져준 것 만은 분명했다.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어린 이승만이 빨리 과거시험에 합격해서 어려운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없는 살림에도 10년을 서당에 보냈던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과거시험에 합격시키려는 마음에서 13살이 되는 1887년부터 과거에 응시토록 했다. 본래는 15살이 되어야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었지만, 그 해만은 왕세자의 나이와 동갑인 14살까지 허락했다. 그러나 마음이 조급했던 이승만의 부모는 한 살을 늘여 응시를 하게 했던 것이다. 과거를 보는 날 이승만은 신무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가난했기 때문에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들어가다가 문지기 포졸의 제지를 받자, 그것을 벗고 맨 발로 들어갔다. 

그러나 시험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 후로도 그는 계속 응시를 했지만, 헛수고였다. 당시는 정부의 부패로 돈과 권력이 없이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처럼 부패한 과거제도마저도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에, 19세의 이승만은 삶의 목표를 잃게 되었다. 

▲ 이승만 10세때, 1885년 8월 미국 선교사 H.G.아펜셀러가 세운 배재학당. 1886년6월 고종이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내렸다. ⓒ
▲ 이승만 10세때, 1885년 8월 미국 선교사 H.G.아펜셀러가 세운 배재학당. 1886년6월 고종이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내렸다. ⓒ

영어나 배운다는 생각에서 배재학당에 입학

그때 도동서당 친구였던 신긍우가 찾아 와서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셀러가 세운 신식학교인 배재학당(培材學堂)에 가자고 끈질기게 권유했다. 그 친구는 나중에 배재학당 교장과 주일대표부 대사를 지낸 신흥우의 형이었다. 

이승만은 영어를 배운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1895년 4월  2일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물론 부모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은 영어에 대한 특출한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방과 후에 미국인 교사들을 찾아다니며 궁금한 것을 물으면서 영어를 익혔다. 그리하여 입학 6개월 만에 신입생들에게 초보 영어를 가르치는 조교가 되었다. 

영어는 그에게 생계 수단이 되기도 했다. 새로 온 미국인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용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그가 진고개의 제중원에 의료선교사로 온 조지아나 파이팅 양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받은 20달러라는 큰 돈을 집에 내놓자, 온 가족이 깜짝 놀랐다. 그 때서야 비로소 이승만은 배제학당에 다닌다는 것을 가족에게 말할 수 있었다. 당시 배재학당에는 나중에 한글학자로 유명해진 주시경(周時經, 1876-1914), 당시의 이름은 주상호)도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주시경은 한글을 연구하러, 이승만은 정치를 하러 배재를 다닌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충구, 이익채, 유창렬과 같은 개화당의 열혈 청년들과 어울리면서 국가의 장래를 걱정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발행하는 학생 신문<협성회보>의 편집장을 맡았다. 그 논조는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따라서 아펜셀러는 학생들이 정부와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사를 검열하려 했다. 그러자 이승만 등은 학교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문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은 10년 전 일본에서 들여온 인쇄기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했다. 언론인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 이승만이 발행한 신문들. 배재학당 토론모임 협성회 대표로서 '협성회보'를 발간했다. 졸업후 이승만이 창간한 '매일신문'과 '제국신문. 이것은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민간 일간지들이다.1)
▲ 이승만이 발행한 신문들. 배재학당 토론모임 협성회 대표로서 '협성회보'를 발간했다. 졸업후 이승만이 창간한 '매일신문'과 '제국신문. 이것은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민간 일간지들이다.

새로운 문명에 적응하기 위해 상투부터 자르다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은 훌륭한 서양인 교사들을 만났다. 특히 미국인 W.A. 노블 박사와 D.A. 벙커, 영국인 F. 올링거 박사 등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영어로 된 책과 신문을 빌려 읽었다. 

제중원의 의료선교사로서 나중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이 된 O.R. 애비슨 박사와는 매주 일요일에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이승만의 과격한 성격을 걱정한 애비슨은 그에게 신중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또한 이승만은 영문으로 ⟪조선역사⟫를 쓰고 있던 호머 헐버트 박사에게는 수시로  만나 한국의 문화에 대해 자문해주었다.  애비슨과 헐버트는 한국이 해방을 맞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때 까지 오래 살면서 이승만을 도왔다.  

▲ 이승만에게 영어와 신문명을 가르쳐준 미국 선교사 노블 박사, 한국식 예복을 입고 배재학당 직원들과 찍은 사진.
▲ 이승만에게 영어와 신문명을 가르쳐준 미국 선교사 노블 박사, 한국식 예복을 입고 배재학당 직원들과 찍은 사진.

이승만이 훗날 회고했던 대로, 그가 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정치적 자유’의 개념이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고,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는 미국인들의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제도는 군주제와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살아온 이승만에게는 너무나 새롭고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사회를 바꾸려 하기 이전에 우선 자기 자신부터 변하려고 했다. 인습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이기 위해 우선 생각해 낸 것이 상투를 자르는 일이었다. 결심이 서자, 그는 양녕대군을 모시기 위한 사당인 지덕사로 달려가서 조상들 위패 앞에 엎드려 시대의 변화에 따르겠다는 선고식을 마첬다. 그리고는 O. R. 애비슨 박사의 집으로 가서 그의 도움으로 상투를 잘랐다. 

그것은 개화파 청년으로서 개인의 차원에서 나마 근대화에 착수해 보려는 결단에서 나온 과감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과 가족에게는 너무 큰 충격이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은 집에 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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