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논에 백일홍을 심다

 

무논에다 나무를 심은 건 올 봄의 일이다
벼가 자라야 할 논에 나무를 심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이 날 일이다.
수백 년 도작한 논에 나무를 심으면서도 아버지와
한마디 의논 없었던 건 분명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도 장남인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여길 훌쩍 떠나지 않으셨던가.
풀어헤친 제 가슴을 헤집던 아버지
손가락의 감촉을 새긴 논은
이제 사라지겠지만 남풍에 족보처럼 좍 펼쳐지던
물비린내 나는 초록의 페이지 덮고
올 봄엔 두어 마지기 논에 백일홍을 심었다.
백일홍 꽃이 피면
한여름 내내 붉은 그늘이 내 얼굴을 덮으리.
백날의 불빛 꺼지고 어둠 찾아오면 사방 무논으로 둘러싸인 들판 한가운데
나는 북 카페를 낼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북 카페를 열 것이다.
천 개의 바람이 졸음 참으며 흰 페이지를 넘기고
적막이 어깨로 문 밀고 들어와 좌정하면
고요는 이마 빛내며 노을빛으로 저물어 갈 것이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활자 앞에 쌀가마니처럼
무겁게 앉아 아버지가 비워 두고 간 여백을 채울 것이다.
무논에 나무를 심은 일이 옳은지 아닌지 그것부터
곰곰 따져 기록할 것이다.

장옥관(1955~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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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의 정확한 명칭인 백일홍나무 혹은 배롱나무라 한다. 백일홍나무 꽃은 자미화(紫薇花)라불린다. 백일홍은 국화과에 속하는 한 해 살이 풀로 6월에서 10월에 걸쳐 계속 핀다. 이 시의 백일홍은 한 해 살이 풀이 아니라 백일홍나무다. 보통 백일홍나무를 백일홍이라 부르긴 하지만 한 해 살이 풀이 있으므로 가려서 써야 한다. 어쨌거나 백일홍나무가 없는 정원은 상상이 안 된다. 그만큼 백일홍나무의 자태는 우아하고 꽃은 아름답다.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무껍질을 손으로 살살 긁으면 잎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논에는 벼를 심어 소출을 얻는 게 정석이다. 논에 배롱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그러므로 세속의 이치와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출의 이익 대신 자연의 미를 얻고 다시 꿈을 꾸겠다는 뜻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이 날 일’이어도 어쩔 수 없다.

시인은 그곳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북 카페, 즉 자신만의 서재를 낼 것이라고 한다. 사방이 논으로 둘러싸인 들녘 배롱나무 숲은 이질적이면서 아름답다. 지금쯤 배롱나무 묘목은 숲을 이루었고 꽃은 만발했을 것이다. 자미화가 지기 전에 노을 지는 저녁 무렵에 시인의 북 카페를 꼭 한번 방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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