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가치가 24년 만에 달러당 140엔이 무너졌다. 엔·달러 환율이 140엔대로 올라선 것은 1998년 8월 이후 처음이다. /연합
엔화 가치가 24년 만에 달러당 140엔이 무너졌다. 엔·달러 환율이 140엔대로 올라선 것은 1998년 8월 이후 처음이다. /연합

세계화된 경제체제에서 모든 국가의 통화정책은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가별 통화정책의 자율성과 영향력은 비대칭적이다. ‘패권’이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국제금융결제망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TF)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으로 국제 결제에 사용되는 통화 비율은 미국의 달러가 39.92%로 1위를 기록했다. 유로존의 유로가 36.56%로 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뒤를 영국 파운드(6.3%)·중국 위안(3.2%)·일본 엔(2.79%)이 잇고 있다.

달러는 독보적인 기축통화로 기능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통화정책은 가장 높은 자율성과 영향력을 지닌다. 달러에 대한 국제 수요가 심각하게 줄어들 가능성이 크지 않기 때문에 미 연준은 달러의 대외적인 신뢰성 훼손을 덜 고려하면서 자국의 경제 상황에 초점을 맞춘 통화정책을 실시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미 연준의 행보는 달러의 상대적 가치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는 미 연준의 통화정책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기준금리를 큰 폭으로 인상하면 다른 국가들은 자본유출로 인한 통화가치 하락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다. 지난해 우리나라 수출 결제대금의 통화별 비중을 보면 달러가 83.9%로 압도적이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1362.6원에 거래를 마쳤다. 원·달러 환율이 1360원대까지 치솟은 것은 고점 기준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4월 21일의 1367.0원 이후 처음이다. 특히 원·달러 환율은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들어 지난 2일까지 1주일 동안 31.3원 올랐는데, 주간 상승폭 기준으로도 지난 2015년 9월 21∼25일의 31.9원 이후 가장 크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가파르게 오른 것은 ‘킹달러’라는 말이 나올 만큼 달러가 초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원화가치의 하락 속도가 유로, 엔, 위안 등 다른 나라 통화보다 유독 빠르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행이 지난 7월 13일 사상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했음에도 원화 약세는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실제 한국은행의 빅스텝 단행 이후 지난 2일까지 달러 대비 원화가치는 4.09% 하락했다. 같은 기간 파운드(-2.98%), 위안(-2.74%), 대만달러(-2.62%), 엔(-2.13%), 유로(-0.93%) 등 주요국 통화와 비교할 때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올들어 달러 대비 원화가치 하락률은 12.4%로 엔(-18.0%), 파운드(-14.6%), 유로(-12.4%) 등에 비해 선방한 편이지만 최근만 놓고 보면 하락 속도가 더 빠른 것이다.

이는 미 연준의 고강도 긴축과 함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의 경기둔화와 무역수지 적자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발(發) 악재의 경우 코로나19 재확산에 따른 도시 봉쇄 등으로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이에 따른 위안의 약세는 중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원화 약세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올들어 지난 8월까지 누적 무역적자는 247억2300만 달러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무역수지 적자는 들어오는 달러보다 나가는 달러가 더 많은 것으로 국내 달러 공급을 줄여 환율 상승을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

원·달러 환율이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으로 치솟으면서 물가 상승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진행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다. 더구나 고환율은 지속적인 원화 약세를 유발해 한국은행이 지속적으로 기준금리를 올리게 하는 등 통화정책의 방향타를 돌리는 것도 어렵게 하고 있다.

환율 상승은 우리 기업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원자재 가격과 원·달러 환율이 각각 10% 상승하는 경우 수입은 3.6% 증가하는 반면 수출은 0.03% 늘어나는데 그친다. 수출 경쟁력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수입물가만 끌어올리는 ‘나쁜 원저(低)’인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환율 방어를 위한 ‘실탄’ 소비로 외환보유액에도 악영향을 주게 된다. 실제 7월 말 기준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4386억1000만 달러로 전고점이었던 지난해 10월의 4692억 달러보다 6.6% 감소했다. 환율 상승이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까지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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