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승만 시대(3) 서재필을 만나다...민비시해 사건후 도피생활
[연재] 이승만 시대(3) 서재필을 만나다...민비시해 사건후 도피생활
  • 이주영(李柱郢)교수
  • 승인 2019.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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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명권에서 교육받은 서재필을 배재학당에서 만나다

저자 이주영(李柱郢): 
건국대 명예교수.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공동대표.
1942 평북 용천 출생. 인천중-제물포고 졸업
서울대-서강대-하와이대 사학과 수학
프린스턴대-콜럼비아대 사학과에서 연구
역사학회-한국 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건국대 사학과 교수,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주요저서: 미국의 좌파와 우파/ 미국사/ 미국현대사의 흐름/ 빼앗긴 서양문명의 역사/ 빼앗긴 우리역사 되찾기/ 한국현대사 이해/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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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위대한 스승 서재필(徐載弼)을 만났다. 서재필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 쿠데타가 실패한 후 일본을 거처 미국으로 망명해 한국인 최초의 의학 박사가 된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그는 조선왕조에게는 역적이 되었으므로 귀국할 수 없는 신세였다. 

하지만, 1894년에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그에 따라 유길준(兪吉濬)을 비롯한 개화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1895년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는 10년만에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미국인 부인과 함께 왔다.     

서재필은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오면서 '협성회'를 조직하고, 토론을 거처 다수결로 합의를 이끌어 내는 민주주의적인 방식을 가르쳤다. 모임에는 정부 관리들도 참여했다. 이승만은 그 모임의 기관지인 <협성회보>의 편집장이었다.   

당시 고종과 그 왕비인 민비에 의해 주도되고 있던 허약한 조선왕국은 강대국들의 사냥터가  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에 대해 가장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능과 부패, 궁중음모에 휩싸인 조선왕조는 대책 없이 하루하루 표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협성회의 토론 주제는 조선의 독립 보존이나 제도 개혁과 같은 정치적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인 선교사들과 교사들은 그들의 정부 비판을 항상 불안한 눈초리로 보게 되었다. 

그 때문에 회원들은 미국인 교사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보다 더 자유롭게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1896년 6월부터는 학교 밖에서 독립협회(獨立協會)로 모이게 되었다.  

서재필은 뒤이어 한글과 영어로 <독립신문>을 발행하면서 한국인들의 머리에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불어 넣으려 했다.

을미사변에 뒤이은 춘생문 사건으로 도피생활

 

열강의 압박으로 독립유지가 어렵게 되어 가자, 조선왕실은 점차 러시아에 기대는 경향을 보였다. 고종과 민비가 러시아를 강한 나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요동반도를 빼앗았지만 러시아가 프랑스,독일과 함께 압력을 넣어 되돌려주게 되었는데, 그러한 3국간섭의 위력에 조선왕실이 감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이러한 조선왕실의 친(親) 러시아적 성향을 돌려 놓으려 했다. 그리하여 1895년 10월 일본인 불량배들을 경복궁으로 들여보내 정권의 실세인 민비(閔妃)를 살해하고 국왕 고종을 유폐시키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백성들은 일본군의 만행에 분개했고, 그에 따라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승만도 분개한 백성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자 1895년 11월 이도철을 중심으로한 일부 군인들이 춘생문을 통해 국왕 고종을 경복궁으로부터 탈출시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는 비밀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계획을 실천에 옮겼지만, 궁궐 안에서 호응하기로 했던 세력이 움직이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이른바 ‘춘생문 사건’으로 이도철 등은 처형당했다.

청년 이승만

이승만은 그 사건의 주모자의 한 사람인 이충구의 친구였기 때문에 몸을 피해야 했다. 그래서 의료선교사인 조지아나 파이팅 양의 도움으로 머리에 붕대를 감아 여환자로 변장한 다음, 양화진의 지컵슨 부인 집으로 숨었다. 

그리고는 걸어서 누님이 있는 황해도 평산으로 가서 3개월을 숨어 있었다. 이충구는 사형은 면했지만  평안도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세는 이승만에게 유리해졌다. 1896년 2월 고종이 일본군의 감시망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함에 따라(아관파천), 친러시아적이면서도 친미적이기도한 새 내각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이승만도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학업을 계속하여 1897년 7월에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배재학당 졸업식은 정부 대신들과 주한 외교 사절들도 참석하는 거창한 행사였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은 졸업생 대표로서 유창한 영어로 ‘한국의 독립’이란 제목의 연설을 했다. 참석자들은 감동했고,  거의 모두는 그가 장차 한국을 이끌어 갈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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