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⑫ NL노선과 주사파의 생성 발전

주사파 등장, 자생적 조직과 북한의 대남연락부 통해 동시에 진행
저항적 민족의식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반미의식으로 표출
北서 강조한 ‘민족자주의식’과 접목되면서 학생운동으로 자리잡아

전대협 1기 의장 이인영의 연설 모습.
전대협 1기 의장 이인영의 연설 모습.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에서 가장 강력하게 등장한 노선은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과 김일성주의를 표방하는 ‘주체사상파’였다. 이들은 87년 6월 항쟁 이후 8월에 충남대에서 발족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1기 의장 이인영)’를 비롯해 재야와 학생운동에서 가장 중심적인 세력이 되었다.

NL노선과 주사파가 강력한 중심세력으로 성장한 것은 두 가지 이론 때문이었다. 첫째는 ‘품성론’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 서적과 사회구성체에 대한 이론을 가지고 ‘잘난체’를 하며 분파주의와 종파주의를 일삼는 운동권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그것이 김영환의 강철서신이었다.

다른 하나는 ‘대중노선’이었다. 제1야당인 신민당과 연합전선을 복원하고, 국민이 받아들이기 쉬운 ‘직선제 개헌’을 중심적인 투쟁 노선으로 채택한 것이다. 조직에서도 분파주의, 종파주의의 온상이었던 ‘언더 써클’을 해체하고 총학생회-단과대 학생회-과 학생회로 이어지는 대중조직 중심으로 조직노선을 채택한 것이다.

이러한 두 개의 노선이 학생운동권에서 주사파를 중심세력으로 만든 것이다. 그에 따라 PD나 CA진영과 달리 NL진영(주체사상파)에서는 이론학습 중심의 ‘써클’이 아니라, 실무적인 조직을 중심에 두었다. 즉, 지하 지도부의 핵심성원이 아니면 고도의 이론학습보다는 현장 실무에 집중함으로써 조직의 분업 효율성을 높인 것이다.

오픈 조직으로 전대협이 존재했다면, 지하 지도부로는 ‘반미청년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활동했다. 지하 지도부에서도 마르크스나 레닌, 마오 등의 정통 공산주의, 루카치나 그람시 같은 네오맑시즘, 종속이론의 원전학습보다는 한국의 근현대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북한에서 내보내는 ‘한민전 구국의 소리’ 방송 청취팀을 가동했다.

그러다 보니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 구국의 소리방송’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와 함께 대중적으로도 북한에 대한 거부감(레드 콤플렉스)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도 전개되었다. ‘북한 바로알기운동’이다. 통일운동과 함께 ‘북한 바로알기’라는 이념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거부감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을 진행했다.

대학생의 사회진출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학생운동=>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 빈민운동이라는 기층 민중으로의 ‘혁명적 사회진출’보다는 교수 등 지식인, 화이트칼라를 비롯해 환경운동이나 문화운동, 청년운동 등 분야별 전문가 운동으로의 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를 혁명적 사회진출에 대비하여 ‘애국적 사회진출’이라고 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노동, 농민, 빈민운동 외에 환경운동, 여성운동, 문화운동, 청년운동 민변 등, 분야별, 전문직 사회운동이 활발해졌다. 즉, ‘PD진영’은 노동운동과 민중당 건설에 집중했지만, ‘NL진영’에서는 전문직 등 분야별 운동으로 진출이 늘어났고, 이들이 연합하는 ‘연합전선운동’이 활성화된 것이다.

◇주체사상파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NL과 주체사상파의 형성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선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진 않다.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이 제시된 것은 ‘통혁당(통일혁명당)’에서였다. 대한민국 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폭력혁명을 통해 "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민족해방과 군사독재와 재벌을 해체하는 민중(인민)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주사파 대부로 '강철서신' 저자인 김영환이 전향 후 북한인권운동가로 활동하며 2014년 강연을 하고 있다.
주사파 대부로 '강철서신' 저자인 김영환이 전향 후 북한인권운동가로 활동하며 2014년 강연을 하고 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국제공산당조직인 ‘코민테른’에서 피압박 식민지 투쟁으로 제시한 투쟁전략이었다. 그리고 베트남 통일전쟁에서 제시된 통일전선 전략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79년 검거된 이재문 등의 남민전(남조선 민족해방전선)도 베트남에서 진행된 ‘베트민(일명 베트콩,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본딴 것이다.

이러한 6~70년대 북한과 연계된 좌익 계열의 혁명노선이 85년 말 이후 재야 학생운동에 접목되는 과정은 두 개의 경로를 통해서였다. 하나는 북한에서 주체사상이 확고한 지도이념으로 자리 잡고, 주체사상에 입각한 혁명노선을 재정립했던 것이다.

◇ 북한에서의 주체사상 정립

북한에서는 82년에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이 발표된다. 72년경, 노동당의 선전부장으로 자리 잡은 김정일이 김일성 후계 구도를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으로 주체사상을 정립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80년 초에 완성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 의해 주체사상이 정립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북한 주체사상 형성과정 전체를 알지 못하는 주장이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북한의 통치 철학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체사상’이라는 철학은 김정일이 노동당에 들어오며 구체화 되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판단이다.

즉, "(주체사상이) 김일성의 항일투쟁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김일성의 후계 구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김정일이 만들어낸 철학 이론이라는 것이 정확한 관점이다. 황장엽 이론에서는 ‘수령론’이 보이지 않지만, 개인-당-수령이라는 ‘사회생명체론’이 정립된 것은 김정일 이후이고, 이것이 김정일 후계 구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실제, 6~70년대 북한의 문건에서 반제반봉건 민족해방혁명론과 코민테른의 통일전선 전략에 입각한 이론은 보이지만, 주체사상에 입각한 자연철학과 ‘사회적 생명체론(수령론)’이라는 사회역사이론은 보이지 않는다. 주체사상의 핵심인 ‘사회적 생명체론’은 80년대 초반에 완성되었고, 그것이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에 게재된 것이다.

그 후 주체사상과 접목된 ‘NLPDR론’이 정립된 뒤, 85년에 통혁당을 ‘한민전’으로 개편하고 ‘구국의 소리방송’을 내보낸 것이다. 이는 한국의 사회구성체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보았던 80년대 이전과 달리, ‘식민지 반(半)자본주의사회’로 본 85년 전후의 이론적 변화를 보아도 알 수 있다.

◇ 국내 주체사상파의 발생 과정

북한과 달리 한국 내에서 NLPDR과 주체사상이 생성되고 발전한 과정은 다른 경로를 밟았다. 구체적 과정은 김영환이 전향을 하면서 구국학생연맹과 반제청년동맹, 그리고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의 결성과정을 밝히면서 드러났다. 김영환은 자신이 주체사상 습득 경로로 "통일부에서 발간한 북한 총람 등의 서적을 통해서" 였다고 했다.

안기부가 1992년 발표한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 지역당 조직도.
안기부가 1992년 발표한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 지역당 조직도.

하지만, 국내 NL과 주체사상의 생성은 단선적인 경로가 아니라, 다양한 경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즉, 구학련과 반제청년동맹 외에도 ‘남민전 잔존세력’, ‘반제동맹당’, 안재구의 ‘구국전위’, 황인오의 ‘중부지역당’, 최호경의 ‘1995위원회(후에 중부지역당으로 결합)’, 김낙중(민중당) 등, 다양한 경로에서 NL노선과 주체사상이 등장했다.

이러한 사정은 당시 배포되었던 주사파 관련 팜플릿 종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강철서신’과 함께 발표된 ‘선진노동자의 임무(심진구 저)’ 외에 ‘5.30 팜플릿’, ‘백산’ or ‘백두산’ 이름으로 된 팜플릿, 등 다양한 팜플릿이 86년 전/후에 배포되었다.

민혁당의 김영환은 "노동당 사회문화부(후에 대남연락부)의 과장이었던 윤택림(가명 김철수)으로부터 민혁당 건설을 주문받았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그는 89년경 한겨레사회연구소 출신의 김철수라는 사람을 만났더니, "북한에서 왔다"며 "민혁당 건설을 주문했다"고 말했다. 이에 "‘반제청년동맹’을 해산하고 민혁당을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또 ‘부여간첩사건’의 김동식의 증언에 의하면, "윤택림은 5개 라인을 관리하고 있었다"며, 대남연락부에서는 "전설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김영환이 "민혁당 조직에 다른 지하조직이 접촉해 온다"고 하자, 윤택림이 "(민혁당 조직활동을) 경인, 전북, 영남 등 5개 지역으로 국한시켰다"고 한다. 같은 시기 활동했던 황인오의 ‘중부지역당’ 등과 겹쳤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외에도 최호경의 ‘1995년 위원회’에서 나타나듯이 자생적인 주사파 조직들도 많다. 최호경의 ‘1995년 위원회’는 자생적인 주사파 조직으로 북한과 연계하기 위해 변의숙을 북한으로 파견했지만, 후에 황인오의 ‘중부지역당’과 연계되어 흡수된다. 그 후 최호경은 ‘중부지역당’의 강원도당 지도책 역할을 한다.

이처럼 주사파의 등장은 자생적인 조직과 북한의 대남연락부를 통해 동시에 진행되었다. 80년대 초반 김정일 후계 구도와 관련하여 주체사상을 수립한 뒤 남쪽으로 전파하려 했고, 국내에서는 85년경, 혁명론 정립 과정에서 자생적인 지하조직과 학생운동 조직에서 NL이론과 주체사상이 자리 잡은 것이다.

◇몸통은 전대협(한총련), 흐르는 피는 NL노선, DNA는 주체사상

따라서 주사파의 생성과 발전은 86년 이후 한국의 재야 학생운동에서 분리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즉, 몸통은 전대협이나 전노협(전노협과 민노총 초기에서만 PD진영이 잠시 우세했다), 전농이지만, 밑바닥에 흐르는 피(투쟁 노선)는 NL이고, DNA(유전자, 사상)는 주체사상인 것이다.

이처럼 NL과 주사파가 재야와 학생운동, 사회운동에 넓고 깊게 뿌리박게 된 것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특이점 중의 하나이다. ‘품성론’과 ‘대중노선’처럼 직접적인 영향도 있지만,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뿌리 깊은 저항적 민족의식(피해의식)과 외세+군사독재+재벌이라는 기득권에 대한 저항의식이 밑바닥에 깔려있다.

저항적 민족의식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반미의식으로 표출되었고, 북한에서 강조하는 ‘민족 자주 의식’과 접목되면서, NL노선과 주사파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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