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이승만의 무장투쟁

임정 1941년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
1942년 2월 20일 국무부 랭던보고서
신탁통치·임정 불승인 가닥잡아
OSS, 이승만 추천한 한인 수용
NAPKO·독수리 작전 뒤늦은 훈련
1942년 6월 13일 이승만 VoA 방송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류석춘
류석춘

미일전쟁을 내다본 이승만은 국제사회가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나아가서 2차대전 승전국으로 전쟁을 마무리해야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차대전을 겪으며 온몸으로 깨달은 교훈이었다. 이를 이루기 위해 이승만은 진주만 공격이 있은 지 3일 만인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가 대일 선전포고를 하도록 했다.

또한 이승만은 전후처리를 위한 연합국들의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임시정부도 참여할 수 있도록 시효 마감 하루 전인 1944년 2월 28일 대독 선전포고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를 주도하고 있던 미국은 이승만의 노력을 외면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유럽 전선의 OSS 와 달리 아시아 전선의 OSS 는 5개 지대로 나누어 활동했다. 버마에는 101지대, 중국에는 202지대, 인도 뉴델리에는 행정적 지원을 담당하는 303지대, 태국 등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404지대, 인도 캘커타에는 인력 충원을 담당하는 505지대를 두었다. 출처: https://arsof-history.org/articles/v3n4_oss_primer_page_2.html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 미국은 추축국 (Axis Powers: 2차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 이탈라아 왕국, 일본 제국) 점령 하에 있는 나라들의 망명정부나 임시정부는 승인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고, 2) 임시정부는 ‘한국민을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라 경쟁적인 한인 그룹 중 하나에 불과하며 국내와의 연결 또한 불투명하다고 판단했다 (고정휴, 2004, 『이승만과 한국 독립운동』 연세대 출판부: 492).

이와 같은 미국의 판단은 전쟁이 발발한 지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국무부가 작성한 한 문건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전쟁 발발 75일만인 1942년 2월 20일 국무부 내의 한국통 랭던 (William R. Langdon, 1891~1963) 은 ‘한국 독립문제의 몇 가지 측면’(Some Aspects of the Question of Korean Independence) 이란 18쪽짜리 문건을 작성했다. 태평양전쟁 기간 미국의 대한정책 골격을 만든 중요한 문건이다.

랭던은 터키 출생 직업외교관으로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서울에서 영사를 지냈다. 1936~37년에는 만주의 대련(大連)과 심양(瀋陽)에서 근무했다. 그 후 동경의 미 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41년 6월부터 국무부 극동국에 소속되었다. 랭던은 국무부 내에서 아시아 전문가였고 한국 사정에 정통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정치고문으로 서울에 파견되기도 했다 (고정휴, 2004: 494).

랭던은 문건에서 1) 전후 상당 기간 한국의 독립 유보와 신탁통치 실시, 2) 임정을 포함한 기존 독립운동 단체들에 대한 불승인 방침, 3) ‘광복군’과 ‘조선의용대’ 같은 중국 본토의 한인 무장 조직에 대한 군사지원 불가 등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문건은 국무부에서 호평을 받으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었고, 미국의 대한 정책에 대부분 반영되었다 (고정휴, 2004: 498).

랭던 문건의 존재를 알 수 없었던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선전포고와 함께 미국을 상대로 ‘한인부대 창설’ 및 ‘무기대여법 (Lend-Lease Act) 에 따른 군사원조’ 등 무장투쟁에 필요한 조치를 적극 요청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광복군’이나 ‘재미한인’으로 구성된 독립적 한인부대 혹은 게릴라부대를 창설해 정규전과 특수전에 투입시켜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남정옥, 2010, "제2장: 태평양전쟁시 이승만 박사의 군사외교 노선과 활동" 『이승만 대통령과 6.25 전쟁』 이담).

이승만이 굿펠로우 (Goodfellow) 에게 보낸 친필 영문 편지 (1942년 6월 추정). 편지는 아래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굿펠로우 대령 귀하, 김구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 광복군을 미군 당국의 지휘 아래 두는 문제를 극비리에 이청천 장군과 의논하고, 동의한다면 즉시 아이플러 소령을 통해 나에게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일절 이 문제를 의논하지 말라고도 말해 두었습니다. 이승만" (Dear Col. Goodfellow: I wrote to Mr. Kim Ku that he should take up with General Lee Chung Chun in strict confidence the question of placing the Korean army under the command of the U.S. authority and that if they agree he should let me know it at once through Major Eifler. I told him also not to approach any one about it. Cordially yours, Syngman Rhee). 이 편지는 독립기념관이 한미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2022년 5월 19일부터 8월 28일까지 개최한 ‘미국과 함께 한 독립운동’ 전시회에서 광복군과 OSS 가 합작한 작전을 설명하면서 이승만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를 두고 뉴데일리 이산하 기자는 2022년 9월 11일 "역사 밑장빼기, 독립기념관은 타짜인가"라는 기사를 통해 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2/09/11/2022091100013.html 자료: 『NAPKO Project of OSS』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24, 미주편 6, 국가보훈처, 2001, 41쪽.

중앙정보국 (CIA, 1947년 7월 설립) 의 전신인 정보조정국 (COI, 1941년 7월 설립) 및 전략첩보국 (OSS, 1942년 6월 설립) 이 그러한 제안의 통로였다. 창구는 두 기관의 최고책임자였던 돈오반 (William J. Donnovan) 아래에서 측근으로 일하던 에손 게일 (Esson M. Gale) 이었다. 그는 1904년 이승만이 미국에 건너올 때 추천서를 써 준 선교사 제임스 게일 (James Gale) 의 조카다. 에손 게일을 통해 이승만은 돈오반은 물론 그의 또 다른 측근인 굿 펠로우 (Preston M Goodfellow) 도 알게 되었다. 당시 미국 정보기관의 최고위층인 이들은 이승만의 판단을 매우 신뢰했다.

이승만의 제안을 받은 OSS는 한국 내부 사정을 잘 알고 또한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도 능통해 대일 정보수집 및 적 후방교란 등 첩보활동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 한국인 첩보대원의 유용성에 주목했다.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그리고 재미 한인 청년들을 활용한 여러 가지 군사작전을 OSS가 검토하고 또 추진하게 되었다.

OSS가 올리비아 계획 (Olivia Scheme)에 따라 버마 전선으로부터 중국과 한국을 거쳐 일본에 침투시킬 특수부대인 ‘101지대’ (Special Unit Detachment 101) 를 창설하고 아이플러 (Carl Eifler) 의 책임 아래 선발한 장석윤·정운수 등 한국인 20명을 현지에 배치한 시점은 1942년 6월 전후였다. 그러나 중국 정보당국은 이 계획에 반대했다 (정병준, 2001, 해제 pp. 4-5, 『NAPKO Project of OSS』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24, 미주편 6, 국가보훈처). 결국 ‘101지대’ 활동 중 일본에 침투하는 최초 계획은 취소되었고, 중국으로 침투하는 계획만이 시행되었다 (US Army Special Operations History 홈페이지).

랭던 문건에 따라 미국의 대한 정책은 공식적으로 ‘임정 불승인’ 및 ‘신탁통치 실시’로 굳어져 갔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보부대를 통한 한인 게릴라부대의 창설과 활용은 101부대의 차질에도 불구하고 더욱 활성화되었다. 1942년 6월 미국 전쟁부는 이승만에게 한인 입대지원자 50명 선발을 요청했다.

장기영 (체신장관 역임), 이순용 (내무장관 역임), 장석윤 (내무장관 역임), 김길준 (미군정장관 공보고문 역임), 한표욱 (주미공사 역임) 등 60명을 추천한 이승만은 이를 기회로 미주 한인청년들과 임정 산하 광복군을 미군 지휘체계 아래의 ‘한인자유부대’ (Free Korean Legion) 로 만들자고 제안해 OSS 동의를 얻었다.

OSS 제안을 검토한 국무부는 ‘이승만의 주미외교부 그리고 김구의 임시정부를 거치지 않고 소수의 한인들을 직접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비밀작전’ 즉 냅코작전 (NAPKO Project) 과 독수리작전 (Eagle Project) 을 각각 가동하기로 결정했다. 냅코작전은 ‘재미한인과 전쟁포로’를 그리고 독수리작전은 ‘광복군과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한 학도병’을 선발 대상으로 삼았다. 냅코작전에는 19명 (정병준 2001: 1), 독수리작전에는 58명의 한국인이 참가했다 (고정휴, 2004: 451~2).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야 훈련이 시작되어 이들은 결국 참전할 수 없었다.

중앙정보국 (CIA) 전신인 정보조정국 (COI) 및 전략첩보국 (OSS) 책임자 돈오반 (William Donnovan).
중앙정보국 (CIA) 전신인 정보조정국 (COI) 및 전략첩보국 (OSS) 책임자 돈오반 (William Donnovan).

미국 정보당국이 이승만과 각종 군사작전의 밑그림을 그리던 시기인 1942년 6월 13일 이승만은 국무부가 운영하는 ‘미국의 소리’ (Voice of America) 한국어 단파방송에 출연해 해(海) 내외 동포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명연설을 했다. 그는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한민족의 단결과 저항을 촉구했다. 이승만의 방송은 몇 주일 동안 반복되었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니,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1942년 6월 13일 송출된 이승만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도 이 사진과 같은 방식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사진은 이승만 대통령이 (오른쪽) 6.25 전쟁 중 파괴된 KBS 방송을 복원하기 위해 1951년 8월 말 부산에 설치한 네 번째 ‘이동라디오방송부대’ (MRBC: Mobile Radio Broadcasting Company) 에 출연해 방송할 원고를 살펴보는 사진이다. 가운데 인물은 동경에서 파견 나온 UN군 심리전 방송 책임자 Eddie Deerfield 중위이고, 왼쪽은 KBS 기술자 이덕빈 (Lee Duk Bin) 이다. https://arsof-history.org/articles/v7n1_proper_ganders_page_3.html

일본의 거짓 승전보에 속고 있던 한국인들에겐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과 같은 소식이었다. 조선방송협회 경성방송국 직원들이 이 방송을 듣다 발각되어 탄압을 받기도 했다 (항일단파방송 사건). 일부에서 이야기하듯 이승만은 결코 무장투쟁 회피론자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여건이 맞을 때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지혜를 가진 지도자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무장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을 때도 미국은 ‘랭던 문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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