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어영대장 이완이 묻고 허생(許生)이 답했다. "남의 나라를 치고자 한다면 먼저 첩자를 쓰지 않고는 여태껏 성공한 예가 없었네…나라 안의 자제들을 뽑아 머리를 깎이고 되놈의 옷을 입혀 들여보내고, 지식층은 빈공과를 보도록 하게. 백성들은 장사꾼으로 멀리 강남에까지 들어가 그들의 모든 허실을 염탐하고, 그 고장 호걸들과 친분을 맺어 둔다면 그때야말로 군사를 일으키고 천하대사를 꾀하여 옛날의 수치도 씻을 수가 있을 것이네."

대남공작일꾼이 묻고 김일성이 답했다. "남조선에는 고등고시에 합격되기만 하면 행정부, 사법부에도 얼마든지 파고들어 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앞으로는 검열된 학생들 가운데 머리 좋고 똑똑한 아이들은 데모에 내몰지 말고 고시준비를 시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열 명을 준비시켜서 한 명만 합격된다 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됩니다. 그러니까 각급 지하당조직들은 대상을 잘 선발해서, 그들이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고시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 주어야 하겠습니다…중앙정보부나 경찰조직에도 파고들 수 있는 구멍이 있습니다. 공채 시험을 거쳐 들어갈 수도 있고 학연·지연 등 인맥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200여 년 전 박지원(朴趾源)의 호방하고 원대했던 기상이 ‘허생전’의 북벌(北伐) 책략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김일성의 50년 장기집권 자신감이 비밀교시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지도자라면 한 세대 30년 정도는 기다릴 줄 아는 배포가 있어야 한다.

이 정도 경지에 이르면 스파이 활동도 예술이다. 합법 신분만 취득하면 된다. 그저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면 된다. 권력이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만 하면 된다. 지령이나 보고도 필요 없다. ‘잠자는 스파이’(Sleeper Agent), 즉 ‘장기잠복 공작원’이다. ‘간첩의 짧은 역사’(Short History of Espionage)의 앨리슨 인드(Allison Ind)는 잠자는 스파이를 ‘평화 시기에는 순진한 커뮤니티에서 활동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파괴활동을 일삼는 자’라고 했다.

2010년 6월 26일, 러시아 해외정보국의 알렉산드르 포테예프 대령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다음날인 6월 27일, FBI는 사망한 미국인의 신분을 도용한 러시아인 10명을 ‘잠자는 스파이’로 체포했다. 하버드·뉴욕·워싱턴 등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저널리스트·금융회사 부사장·부동산회사 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이었다. 이중 몇몇은 앨 고어·힐러리 클린턴과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기밀정보에는 접근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본인들의 자백이 없고 러시아가 이들의 추방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이들을 스파이로 볼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미국 시민들이었다.

2022년 7월 2일 국가정보연구회 세미나에서 전직 국정원 고위 간부가 묻고 전직 정찰총국 김국성 대좌가 답했다. "80년 가까운 그 장구한 세월 동안 북한은 0.01mm의 변화도 없이 남조선 해방이라는 대남공작을 변함없이 전개해 오고 있다. 북한 대남공작기관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세습체제가 이어지면서 오히려 점점 더 진화·발전되고 있다. 대한민국 국정원과 북한 정찰총국의 역량을 비교하라면 나는 언제든 거침없이 정찰총국의 손을 들어 줄 것이다."

김일성은 1973년 대남공작 비밀교시 이후 20여 년을 더 살았다. 김일성이 죽고서도 다시 한 세대가 더 지난 지금까지도 북한에선 여전히 김일성의 유훈통치(遺訓統治)가 힘을 받고 있다. 김일성의 잠자는 스파이! 언제 깨어날지, 아니면 이미 깨어나 활동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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