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온 선교사들, 100년의 이야기] ⑦ 언론과 복음

조정·관아서 동네곳곳 붙이는 벽보가 고작이었던 구한말의 ‘뉴스’
서적·잡지 대량 출판으로 우리나라를 외국에 적극 알린 선교사들

‘한국 더 사랑한’ 헐버트, 내부사정 서방세계 알리는 데 큰 공헌
“헐버트, 한국위해 분개하고 각국향해 한국 진정 발표해 준 사람”

발간과 함께 조선사회 큰 반향 일으킨 만백성의 대변지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창간한 베델 “한국위해 싸우는 것, 하나님의 소명”

[편집자주] 조선 후반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르는 근현대사에서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주류였다. 즉, 기독교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의 근간이 됐다.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활동을 빼고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논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전래과정과 선교사들의 업적 및 활동상이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자유일보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그 복음이 오늘날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사명감으로 이 시리즈를 기획했다.

구한말 조선의 언론을 일으킨 선교사들과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우측 하단).
구한말 조선의 언론을 일으킨 선교사들과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우측 하단).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언론 매체가 등장한 것은 구한말에 이르러서다. 그때까지는 뉴스라고 해봐야 이따금씩 조정이나 관아에서 동네 곳곳에 붙이는 벽보가 고작이었다. 당시 5일이나 10일에 한번 서는 장날은 필요한 물건을 사고 팔기도 하지만 새로운 소식을 얻기 위해서도 중요한 날이었다. 이같은 정보의 빈곤은 신분을 막론하고 다르지 않았다. 전국 장터를 누비는 보부상들을 만나 단편적인 소식이라도 전해 듣는게 당시 백성들에게는 세상 소식의 거의 전부였던 셈이다. 

구한말의 조선은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이권 쟁탈전과 조선 왕정 자체의 구조적인 모순 등으로 인해 그야말로 혼돈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국내외 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국민들의 각성이 필요한 시기였다. 

당시에 언론이 보편화 돼 있어서 지금처럼 국내외 정세를 알기 쉽게 풀어 주었다면 어땠을까. 즉, 당시의 세계적인 흐름에 대한 설명과 함께 청나라와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의도를 분석해주는 한편, 조선 조정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벌 다툼과 그로 인해 야기될 치명적인 폐해를 사람들에게 알렸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아마도 많은 국민들이 국내외 정세에 눈을 떴을 것이고, 각성된 국민들은 왕정 대신 의회를 중심으로 한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를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일 만큼은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신기하게도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병원과 학교가 세워지고, 정치제도가 민주적으로 바뀔 뿐만 아니라, 건강한 언론이 세워졌다.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인 영국과 미국 같은 나라들이 민주주의를 세우고 유지하는 원동력은 각성된 국민들이며, 또한 그 국민들을 깨우는 것은 건강한 언론이다. 영국이나 미국이 건강한 리더십으로 세계를 리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언론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불의와 거짓을 몰아내고 정의와 진실을 추구한다. 언론의 역할이 꼭 이와 같다. 복음의 역할과도 잇닿아 있는 언론은 하나님이 세계를 경영하시는 도구 중의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신문 ‘한성순보’...갑신정변 소용돌이 속 폐간

'한성순실' 편집실(추정)과 창간호. '한성순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외교통상 사무 전반을 담당했던 통리아문 소속의 박문국에서 발간했다. 김인식, 장박, 오용묵, 김기준, 강위, 주우남, 현영운, 정만조, 오세창 등 박문국 주사와 사사(司事)들이 한국 최초의 기자였다. /전우용 제공
'한성순실' 편집실(추정)과 창간호. '한성순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외교통상 사무 전반을 담당했던 통리아문 소속의 박문국에서 발간했다. 김인식, 장박, 오용묵, 김기준, 강위, 주우남, 현영운, 정만조, 오세창 등 박문국 주사와 사사(司事)들이 한국 최초의 기자였다. /전우용 제공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은 구한말의 ‘한성순보(漢城旬報)’다. 1883년 10월 31일 박영효 등 개화파가 주도해 창간한 정부신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인 박문국에서 순보(旬報)라는 말 그대로 10일에 한 번씩 발간했다. 한성순보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있었지만, 순한문으로 간행돼 널리 일반 백성들한테까지 퍼질 수 없었다. 이런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한성순보는 이듬해 12월에 발생한 갑신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문국이 불에 타 소실되면서 폐간되고 말았다.

그러나 신문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한 정부의 인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구한말 정부는 ‘한성순보’를 다시 복간하는 형태로 이름을 ‘한성주보(漢城周報)’로 바꿔 1886년 1월25일부터 새롭게 발간을 개시한다. ‘한성주보’는 주보(周報)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주일에 한 번씩 발행하는 주간지였다. 국한문을 혼용해 발간한 이 신문은 처음으로 한글이 쓰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성주보도 2년 6개월 정도 유지되다가 재정난으로 중단되고 만다.

당시 조정 내에서는 조선의 법과 제도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온건개화파, 서구의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까지도 적극적으로 도입해 조선을 총체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급진개화파, 그리고 오로지 쇄국 정책만을 고수하는 수구파로 나뉘어 치열한 당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세력들이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때그때 일본이나 청나라, 러시아, 미국 등 외세와 결탁하면서 조선의 앞날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와중에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주로 조선의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도입하자는 온건개화파의 주장을 대변했다. 

◇서적·잡지 등 대량 출판으로 우리나라를 외국에 적극 알린 선교사들

재정난으로 인해 정부의 신문 발행이 중단된 상황 속에서, 각종 서적 및 잡지 등의 대량 출판을 통해 우리나라를 외국에 알리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간 이들도 다름 아닌 선교사들이었다. 그 초석을 놓은 사람이 1887년에 내한한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프랭클린 올링(Franklin Ohlinger, 1845-1919)다. 올링거 선교사는 조선에 오기 전 중국에서 16년간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가 아펜젤러 선교사의 요청으로 서울 정동의 배재학당 교사로 부임한다. 

무엇보다도 출판사업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올링거는 1890년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를 설립한다. 이 출판사는 당시 정부의 박문국 인쇄시설을 제외하고는 국내 유일의 인쇄소였는데, 한글·영어·중국어 세 가지 언어로 인쇄·출판되었기 때문에 삼문(三文)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올링거는 또한 189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잡지 ‘The Korean Respository’를 간행한다. 이 잡지는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풍습, 언어 등을 해외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외국 사람들과 한국에 파송될 예비 선교사들에게 각종 정보를 사전에 제공했다. 

올링거 선교사와 그가 저술한 'The Korea Repository' 5권 2호 (1898년 발행).
올링거 선교사와 그가 저술한 'The Korea Repository' 5권 2호 (1898년 발행).

안타깝게도 올링거 부부는 1893년 초여름에 어린 두 자녀를 병으로 연달아 잃는 아픔을 겪는다. 두 자녀를 양화진에 묻은 후 같은 해 9월에 약 6년간에 걸친 한국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올링거는 1895년에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1911년까지 선교사로 헌신하다가 은퇴한다. 비록 한국에서의 선교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올링거는 한국 기독교는 물론 인쇄와 출판 및 교육 사업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한국 문서 선교와 출판 근대화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 더 사랑한’ 헐버트, 내부사정 서방세계 알리는 데 큰 공헌 

구한말 언론을 언급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미국인이 또 있다. 바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으로 불리는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선교사다. 그는 미국의 매우 저명한 집안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 총장이자 목사였고, 어머니는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인 다트머스 대학 설립자의 후손이었다. 

호머 헐버트 선교사와 그가 도입한 한글 띄어쓰기. /국가보훈처·SBS
호머 헐버트 선교사와 그가 도입한 한글 띄어쓰기. /국가보훈처·SBS

헐버트는 1884년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대학 재학 중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만드는데 영어 교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1886년 7월5일 조지 길모어(Gilmore, G. W, 1857~?) 선교사, 달지엘 벙커(Dalziel A. Bunker, 1853-1932) 선교사와 함께 처음 조선 땅을 밟았다. 

하지만 헐버트는 이내 조선의 교육 현실에 환멸을 느낀다. 당시 육영공원의 특성상 대부분의 학생들은 부패한 관리들의 자녀들이었는데, 이들이 학업에 열성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결국 1891년 12월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오하이오주 제인즈빌에 있는 퍼트남 군사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러나 미국으로 돌아간 후 조선에 대한 사랑을 저버릴 수 없었던 헐버트는 잠시 안식년 차 미국에 와 있던 아펜젤러 선교사로부터 조선에서 다시 봉사할 것을 권유받고, 1893년 9월에 교사가 아닌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가족들과 함께 조선 땅을 다시 밟게 된다.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배재학당 교사를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배재학당 내 감리교 출판사인 삼문출판사 운영에 자원한다. 

언론의 역할과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헐버트는 올링거가 귀국함으로 인해 휴간됐던 The Korean Respository를 속간했고, 1899년에 동 잡지가 폐간되자 1901년 The Korean Review라는 이름의 영문 월간지를 새로 창간한다.The Korean Respository와 The Korean Review는 모두 소식지이자 학술지로서 한국 내부 사정을 서방세계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The Korean Respository는 1897년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전했으며, The Korean Review는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 행위와 침략정책의 부당성을 규탄하는 기사를 꾸준히 게재했다. 결국 헐버트가 발행하는 The Korean Review는 일본 당국의 감시하에 놓이게 됐고, 1906년 12월 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되게 된다. 

2015년 8월 12일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헤이그 밀사 파견에 관한 증언 등 헐버트 박사의 업적을 담은 기록을 공개하고 있다. /연합
2015년 8월 12일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헤이그 밀사 파견에 관한 증언 등 헐버트 박사의 업적을 담은 기록을 공개하고 있다. /연합

헐버트는 국내의 다른 어느 선교사들보다 한국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육영공원의 교사로 재직 중인 1891년에 세계지리와 문화를 소개하는 내용의 교과서 격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한글로 출판했는데, 이것이 조선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사민필지’는 ‘선비와 백성이 꼭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으로, 세계 각국의 지리 및 사회가 소개돼 있다. 헐버트는 이 책의 서문에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 하리오”라고 썼을 정도로 당시 천대받던 한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헐버트는 또한 1896년에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아리랑’을 역사상 최초로 서양 음계로 채보해 The Korean Respository에 실어 전 세계에 소개했다. 190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역사서인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n)’를 출간했다. 

◇“헐버트, 한국을 위해 분개하고 각국을 향해 한국의 진정을 발표해 준 사람”

1904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 공사관은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자국의 선교사들이 조선의 정치적 문제에 절대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한다. 이에 일부 선교사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며 일본의 만행에 눈을 감았으나, 헐버트는 고통받는 한국인을 돕는 것이 ‘참선교’라며 적극적으로 외교문제에 개입한다. 대표적인 활동이 1905년 11월에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된 일이다. 

헤이그 특사들과 헐버트 선교사.  /국사편찬위원회·국가보훈처
헤이그 특사들과 헐버트 선교사.  /국사편찬위원회·국가보훈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헐버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불과 수개월 전인 1905년 7월에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권 보장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각각 인정하는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을 이미 체결했던 미국은 헐버트에게 시간을 끌며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같은해 11월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조선의 외교권은 박탈되게 된다. 

헐버트는 을사늑약 직후인 1906년에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간행해 구한말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이해관계와 조선이 현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했다. 헐버트는 이 책에서 특히 “한민족이 나라를 빼앗긴 주된 원인은 미국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하고 친일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조국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1882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제1조에는 “제3국이 체결 당사국의 어느 한 나라에 대해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 다른 당사국도 권고와 주선을 다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하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었다. 

헐버트의 조선을 위한 국권 회복운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개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고종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이 회의를 통해 을사늑약 체결의 불법성을 알리는 외교적인 통로로 활용할 것을 권고한다. 이에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을 밀사로 파견했으며, 헐버트 자신도 헤이그로 함께 가서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본의 압력으로 특사들의 회의 참석은 끝내 무산되고 만다. 결국 일제는 헤이그 밀사 파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폐위시켰고, 헐버트 또한 일제이 압력을 받고 미국 정부의 소환 형식으로 조선을 강제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헐버트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강연 및 기고와 저술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1909년 미국 포틀랜드 한 교회에서 그는 “나는 언제나 한국민을 지지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권리와 재산을 빼앗겼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대변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또 1915년 12월12일자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은 정식으로 조약을 맺은 친구의 나라, 한국을 배신한 사람이다”라며 조선을 위해 자국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을사늑약의 진상을 세세히 밝히며 루스벨트 책임론을 구체화한 헐버트의 '뉴욕타임스' 기고문. ('한국과 벨기에에 대한 미국의 정책' 1916년 3월 5일.) 
을사늑약의 진상을 세세히 밝히며 루스벨트 책임론을 구체화한 헐버트의 '뉴욕타임스' 기고문. ('한국과 벨기에에 대한 미국의 정책' 1916년 3월 5일.)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뤼순감옥에서 일본 경찰에게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헐버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헐버트는 이토가 혹독한 정략을 사용해 각국의 이목을 가리고 있을 때, 한국을 위해 분개하고 각국을 향해 한국의 진정을 발표해 준 사람이다. 한국을 위해 진력한 공은 몰각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는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헐버트가 1934년에 모교인 다트머스 대학에 제출한 ‘졸업후 신상기록부(Post Graduate Data)’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겨져 있다. 

“나는 천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의 그러한 행동은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발간과 함께 조선 사회에 큰 반향 일으킨 만백성의 대변지 ‘독립신문’

순 한글과 영어로 찍어낸 독립신문.
순 한글과 영어로 찍어낸 독립신문.

헐버트는 1896년부터 발간된 ‘독립신문’ 출간에도 깊게 관여했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한글 신문이다. 서재필은 1884년에 발생한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 이 정변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가담자들과 함께 역적으로 몰려 가족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서재필 혼자만 가까스로 몸을 피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하지만 서재필의 미국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혈혈단신인 데다가 영어가 서툴러 취업도 되지 않았다. 그는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청년회에 가서 영어 공부를 했다. 일요일에는 예배, 성경공부, 기도회 등 각종 교회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원래는 신앙심이 깊어서가 아니라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결국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게 됐다. 

서재필은 1890년 6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다. 그는 언젠가 조국으로 돌아가 봉사하려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어 서재필 등 갑신정변 주역들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자, 서재필은 조선을 떠난 지 11년만인 1895년 12월에 귀국한다. 개화파 정부는 그를 외부협판(지금의 외교부 차관)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서재필은 이 같은 제의를 사양하고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그는 권력의 외부에서 미국 시민의 자격으로 신문을 간행해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서재필 박사와 독립신문, 그리고 독립문.
서재필 박사와 독립신문, 그리고 독립문.

그러나 서재필은 당시 한국 사정에 밝지 않았을뿐더러 신문 발행 경험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삼문출판사의 책임자인 헐버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헐버트는 ‘독립신문’ 발행이 한국인들에게 매우 유익할 것으로 판단해 인쇄 직원 두 명을 지원하는 한편, 자신이 운영하는 삼문출판사에서 ‘독립신문’을 인쇄할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한다. 또한 헐버트는 ‘독립신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던 영문판 The Independent의 기사 작성 및 편집을 책임졌다. 

‘독립신문’은 발간과 동시에 조선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순한글로 간행된 신문이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빈부귀천을 구분하지도 않고, 모든 조선 사람들의 대변지가 될 것을 분명히 한 점도 사람들이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서재필이 직접 지은 1896년 4월 7일 자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에는 다음과 같이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백성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한성 백성만을 위한 게 아니라 조선 전국 백성들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려 주려 함.”

이어서 서재필은 띄어쓰기를 도입하는 취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하려 함이요, 또 구절을 떼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게 하도록 함이라.”

최초로 한글에 띄어쓰기를 사용한 사례는 1877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선교사가 쓴 ‘조선어 첫걸음’이다. 그러나 서재필의 언급과 같이 우리말에서 띄어쓰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독립신문’을 발간할 때 부터다. 이때 띄어쓰기를 도입한 이가 바로 헐버트 선교사다. 헐버트는 순한글로 ‘독립신문’을 간행할 즈음에 주시경 등과 더불어 한글을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했다. 이후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나오면서 띄어쓰기는 보편화 됐다. 

이처럼 ‘독립신문’ 출연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자, 이에 자극받은 개화파 지식인들의 주도 아래 1898년 새로운 민간신문인 ‘매일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이 잇달아 창간됐다. 비록 ‘독립신문’은 친러 수구파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아 1899년 12월에 폐간됐지만 다른 신문들이 우후죽순 간행되며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도 근대적인 신문제도가 정착하게 됐다. 

제국신문.(1898년)
제국신문.(1898년)

또한 이 시기에 신문 발행이 일반적으로 널리 확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나 알가 쉬운 한글로 간행되었기 때문인 이유가 컸다. 즉, 한글의 보편화가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셈이다. 그 뒤에는 한국인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일깨우면서 널리 사용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고민했던 헐버트의 숨은 노력과 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 창간한 베델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다”

구한말 언론을 이야기 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외국인이 있다. 바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 1872-1909)이다. 베델은 1904년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던 Daily Chronicle의 특파원으로 처음 한국에 방문한다.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강요하는 신문사 방침에 반발해 사직하고, 그 해 7월 양기탁과 함께 순한글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데일리뉴스’를 창간한다.

어니스트 베델(좌)과 대한매일신보(우).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국립중앙도서관
어니스트 베델(좌)과 대한매일신보(우).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국립중앙도서관

당시는 일본이 국권침탈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였다. 1905년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쟁취한 일본은 같은 해 11월에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이후,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한다. 아울러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더욱 강화하는 수단으로 언론에 대한 사전 검열도 실시했다. 

이에 국내의 민족지들은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상황을 대내외로 널리 알리면서 일제의 침략 행위를 격렬하게 규탄하며 조선의 대변지가 되어준 신문이 바로 ‘대한매일신보’다. 이 신문은 베델 명의로 발행이 됐는데, 당시 영국인은 한국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베델 명의의 신문은 일제의 검열과 압수를 피할 수 있었다. 

베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언론 탄압 속에서도 신속한 보도와 준열한 논설로 한민족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오죽했으면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통감인 나의 백 마디 발모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 그중에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 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어니스트 베델.
어니스트 베델.

이 때문에 조선통감부는 1908년에 베델이 일본인을 배척하고 한국인을 선동한단는 이유로 영국 상하이 고등법원에 베델을 제소했고, 유죄 판결을 받은 베델은 상하이로 호송돼 3주간의 금고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베델은 서울에 돌아온 후에도 일제의 탄압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으며, “내가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베델은 스트레스와 심장질환으로 1909년 5월 1일, 36세의 젊은 나이에 소천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된다.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애도와 추모의 물결이 끊이질 않았다. 독립투사이자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역임했던 박은식은 다음과 같이 베델의 죽음을 탄식했다. 

“하늘이 공을 보내고는 다시 데려갔구나. 구주의 의혈남아 동쪽의 어둠을 씻어내고자 삼천리 방방곡곡에 신문을 뿌렸네. 꽃다운 이름 남아서 다함없이 비추리.”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던 양기탁은 다음과 같은 추모의 글을 남겼다.

“대영 남자가 대한에 와서 한 신문으로 어두운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 온 것도 우연이 아니건만 어찌 급히 빼앗아갔나. 하늘에 이 뜻을 묻고자 하노라.”

베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조문객이 몰렸다. 이와 관련해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양화도(양화진) 장지로 가는 한국인 가운데 곡하는 자들이 상당수였고, 부인들도 배설 공(公)의 집 근처에서 통곡했다. 영국 목사 터너가 장례식을 인도하고 한국 목사 전덕기가 기도한 뒤 성분(관을 묻고 묘를 흙으로 쌓아 올리는 것)을 하였는데 많은 이들이 분상(봉분) 앞에서 절하며 그를 기렸다. 장지까지 따라온 인원은 내외국인 합쳐서 1000여 명이었다.”

베델의 장례식. 1909년 5월 2일 거행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의 장례식에서 수많은 조문객이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로 향하는 베델의 상여를 따르고 있다.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였던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1869~1931)가 촬영했다.
베델의 장례식. 1909년 5월 2일 거행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의 장례식에서 수많은 조문객이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로 향하는 베델의 상여를 따르고 있다.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였던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1869~1931)가 촬영했다.

베델은 숨을 거두면서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여원히 살아남게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해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대로 ‘대한매일신보’는 현재까지 ‘서울신문’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웨스트민스터보다 한국땅 묻히기 원했던 헐버트, 양화진에 잠들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7월 1일,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백발의 미국노인이 워싱턴 D.C의 주미 한국대사관을 나서고 있었다. 그때 한 AP 통신 기자가 그 노인에게 다가가서 4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는 소회를 묻는다. 노인은 어린아이 같이 들뜬 표정으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노인은 한국의 복음화와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헐버트 선교사였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장소다. 왕실의 결혼식과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러지며, 내부에는 영국의 역대 왕들과 여왕들뿐만 아니라 각계의 유명인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정치가 처칠, 문학가 세익스피어·찰스 디킨스, 과학자 뉴턴·다윈, 음악가 헨들 등의 묘와 기념비가 있다. 즉,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다는 것은 영국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그럼에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더 소원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던 헐버트 선교사에게 한국 땅을 다시 밟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1949년 광복절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헐버트는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한 달여 만에 인천항에 도착한다. 

1949년 7월 고종황제의 고문이며 이승만의 스승이자 평생 동지인 호머 헐버트박사가 대통령이된 이승만 박사의 초청으로 40년만에 인천항에 도착하는 모습. 헐버트박사는 3.1만세운동 1주년 기념일에 미국에서 10명의 미국인 독립투사들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 첫번째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49년 7월 고종황제의 고문이며 이승만의 스승이자 평생 동지인 호머 헐버트박사가 대통령이된 이승만 박사의 초청으로 40년만에 인천항에 도착하는 모습. 헐버트박사는 3.1만세운동 1주년 기념일에 미국에서 10명의 미국인 독립투사들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 첫번째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러나 고령과 여독으로 곧바로 병원에 입원을 했고,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은 지 일주일 만에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헐버트의 장례는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장엄하게 치러졌으며 그의 유해는 그가 바라던대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그리고 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헐버트가 무엇보다 마음 아파했던 것은 광복 뒤 찾아온 분단 소식이었다. 헐버트이 아들 윌리엄 헐버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친께서는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해방된 한국이 자유롭고도 독립된 국가가 되기를 40년 동안이나 염원하면서 살았으며, 일생 동안 그 소망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해방된 이후 한국은 핏줄이 같은 민족이면서도 타의에 의해 제멋대로 그어진 38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을 때, 당신께서는 깊은 실의와 슬픔에 빠졌었습니다. 통일된 한국이 그러한 역경을 딛고 일일서서 자신에게 그토록 소중하고도 찬란한 미래를 이룩하게 되는 것이 선친의 간절한 소망이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양화진의 헐버트의 묘비. 
양화진의 헐버트의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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