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명(月明)

 

한 그루 나무의 수백 가지에 매달린 수만의 나뭇잎들이 모두 나무를 떠나간다.
수만의 나뭇잎들이 떠나가는 그 길을 나도 한줄기 바람으로 따라나선다.
때에 절은 삶의 무게 허욕에 부풀은 마음의 무게로 뒤처져서 허둥거린다.
앞장서던 나뭇잎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쩌다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 하나 달을 싣고 있다.
에라 어차피 놓친 길 잡초 더미도 기웃거리고 슬그머니 웅덩이도 흔들어 놀밖에
죽음 또한 별 것인가 서로 가는 길을 모를밖에.

박제천(1945~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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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月明)’은 신라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를 바탕으로 쓴 시다. 제망매가는 일찍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비는 노래로 신라 경덕왕 때 승려 월명사(月明師)가 지었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生死路隱 此矣 有阿米 次肹伊遣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枝良出古 去如隱處毛冬乎丁/ 阿也 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죽고 사는 길이 여기 있으매 망설이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질 낙엽처럼/ 한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 모르네/ 아으 미타찰(彌陀刹)에서 나 도 닦아 기다리겠노라"

박제천의 ‘월명’은 제망매가의 구조를 차용하고, 죽음을 자연 현상의 일부로 인식하는 자세를 보여 준다. 제망매가는 "한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 모르는 저승이지만 미타찰(彌陀刹)에서 도를 닦아 죽은 누이를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하여 허무를 극복한다. 이에 비해 ‘월명(月明)’은 ‘수만의 나뭇잎들이 떠나가는 그 길을 나도 한줄기 바람으로 따라나선다. /때에 절은 삶의 무게 허욕에 부풀은 마음의 무게로 뒤처져서 허둥거린다.’ 라고 함으로서, 생전과 마찬가지로 저승길에서도 물에 젖은 낙엽처럼 바람에 실리지 못한 채 낙오되고 말 거라고 상상한다. ‘앞장서던 나뭇잎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쩌다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 하나 달을 싣고 있다./ 에라 어차피 놓친 길 잡초 더미도 기웃거리고 슬그머니 웅덩이도 흔들어 놀밖에/ 죽음 또한 별 것인가 서로 가는 길을 모를밖에.’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처럼 저승길이 순탄치 못할 것이란 비유는 살아생전 시인의 삶이 비주류였듯 죽어서도 그럴 거라는 예감이다. 그런 예감은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이 되고, 마침내 ‘죽음 또한 별 것인가 서로 가는 길을 모를밖에’ 하고 달관의 경지로 승화된다.

‘월명’은 ‘제망매가’의 중심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했다. 나뭇잎, 가는 길, 바람뿐만 아니라 주제인 삶과 죽음, 그리고 그것의 초월도 그러하다. 나뭇잎은 살아생전 제각기 삶을 의미한다. 박제천의 시에서 나뭇잎은 낙엽이 되었지만 ‘때와 허욕’에 절어 바람에 실려가지 못한 채 웅덩이에 처박혀 젖어버린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성이며 삶의 숙명인 동시에 허망함의 인식이다. ‘앞장서던 나뭇잎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쩌다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 하나 달을 싣고 있다.’ 서로 가는 길 모르는 허망한 인생이지만 ‘나뭇잎 하나 달빛을 싣고’ 있는 것을 볼 줄 아는 시인의 시선은 허망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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