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천
이주천

9월 7일 오후 2시, 건국이념보급회가 주관해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이승만 하와이 30년’ 시사회가 국회대회의실에서 열렸다. 감격에 울먹이는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 시사회장으로 회의실을 공여해준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의 인사말이 있었다. 반생을 이승만 연구에 올인한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은 "이승만을 비난했던 좌익의 비판에 맞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승만의 지난 하와이 행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다큐의 의미를 설명했다.

다큐멘터리는 총 5부로 구성됐다. 이승만 연구가(겸 이민사 연구가) 이덕희 교수가 진행한 시사회의 첫 장면은 이승만 대통령의 타계였다. 망명한 하와이 요양원에서 고독하게 생을 마감하는 우남 이승만. 그 배경이 된 푸른 하늘과 바다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잊혀진 위대한 인물을 회고하게 했다. 우리는 왜, 어떻게 이승만을 잊어버리고 말았나?

영화 제목의 ‘하와이 30년’은 전반기 25년과 1960년 봄 하야 이후 5년으로 구분됐다. 우남이 1904년 미국으로 갈 때 중간 경유지였던 하와이에 머무른 것이 30년 여정이 될 줄 감히 예상했을까?

우남은 반역죄에 몰려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 동안 영어의 몸이 됐다. 감옥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많은 영어서적을 읽었는데, 특히 1874년 출간된 <미국의 교육제도>를 일일이 기록, 암기했다. 이는 그의 저서 <독립정신>에서 교육제도에 대한 언급의 밑바탕이 됐다. 우남은 동포들에게 많은 연설을 했다. 그 내용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신앙과 교육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첫째, 교육자로서의 우남이 탄생됐다.

우남의 연설을 들은 한인들은 3개월 뒤 자발적으로 모금한 300달러를 농장주에게 전달하며 교회를 세워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우남은 1000달러를 들여서 한인들에게 새 건물을 짓게 하고, 모금된 300달러는 실내장식에 사용했다고 한다. 여기서 두 번째, 교육과 신앙을 접목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우남을 발견하게 된다.

뜻했던 교육사업은 최초의 한인남녀학교로 발전했고, 하와이 각지에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동포 유대관계가 지금까지 굳건히 뿌리내렸다. 이를 동지회 전현직 회장이 증언했다

우남은 1910년까지 프린스턴대 박사학위를 마치고, 1913년 하와이 한인기숙사 사감으로 초빙됐다. 미국에서도 흔치 않은 지성인으로, 교포사회에서는 더욱 유명인사였다. 당시 하와이에는 미국 이민 동포의 10%를 차지하는 45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아마 많은 한인들이 미국 동부에서 하와이로 거주지를 옮겨, 자주 조선 독립·자유민주주의·통상 자유·민주교육 등을 실현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점에서 세 번째, 우남은 건국을 위해 준비된 지도자였다.

다큐 제작 과정에서 한인 1세대가 은퇴자의 자립 목적으로 시작한 녹슨 숯(목탄) 가마터를 발견한다. 비록 사업은 실패했지만, 이 경험은 우남이 건국 이후 국가 틀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윤석열 정부의 박민식 보훈처장은 하와이를 방문, 우남이 거처했던 요양원을 돌아봤다. 그리고 국가차원에서 우남에 걸맞는 역사 정립을 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박 처장은 우남의 공과를 두고 모택동의 공칠과삼(功七過三)이란 표현을 했다. 과연 그 표현이 적절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모택동은 권력욕에 의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고 정적 숙청과 탄압, 수천만 명의 인명피해 그리고 문화재 파괴 등 수많은 폐해를 낳았다. 그것과 우남의 장기집권·부정선거의 과오를 대등하게 비유할 수 있는지, 그 점이 개운치 않았다.

아무쪼록 이 다큐멘터리가 두 달 뒤 열리는 하와이영화제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남에 대한 연구와 붐이 태평양을 넘어 다시 한국에 상륙해 줄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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